이카즈치 곤다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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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대학 다문화복지과

일본문화 ☐ ☐ ☐ ☐ ☐ ☐ ☐ ☐ ☐ ☐ ☐ 기모노 다도 스모 일본정원 게다 와가시 목욕문화 지장보살 달마인형 가부키 아이누족

☐ 기모노 기모노(着物)는 의복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전통의상인 와후쿠(和服) 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기 모노는 나가기(長着:긴 의상) 를 의미하며, 문양이나 염 색과 관계없이 오비(帶:띠)로 허리를 묶는 원피스 형태 를 띠고 있으며 우와기(表着:겉옷)로 입는 경우가 많다.

기모노가 어느 정도 틀을 갖춘 것은 8세기경 나라(奈良)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즉 지금의 기모노와 유사한 고소데(小袖)는 12세기 헤이안 시대 남녀가 구분없이 입던 속옷이었으나, 13세기 가마쿠라 시대에는 우와기 로 입기 시작하였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다소 길게 만들 어 입었는데, 이것이 기모노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기모노 옷을 길게 만들어 입게 된 것은 무로마치 막부가 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즉 막부는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카마치(城下町: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 를 만들어 상인들이 모여 살도록 하여 상업을 발전시켰 다. 하지만 계급의 구분은 엄격했으며, 무사는 당연히 소비계급이었다. 한 곳에 정착하는 생활이 시작되자, 편리보다는 멋을 추 구하게 된 사람들 사이에 하카마( 姱 :바지)를 입지 않고 웃옷을 길게 입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기모노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남자는 종종 외출할 때 하카마를 입고 다니기는 했지만, 여성은 기모노만을 입 는 경우가 많아 점차 성별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의 기모노는 멋을 강조하기 위해 화려한 장식이 있는 것이 특징이나, 남 자의 기모노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장식품을 달지 않는 대신에 형태, 재료, 염 색, 맵시 등을 중시했다. 이것은 봉건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관련이 있다. 특히 에 도 시대 초기의 무사 사회에서는 지배자인 쇼군(將軍), 다이묘(大名), 하급무사 등과 같 은 계급에 따라 기모노 종류를 엄격히 구분했다. 또한 조닌 사회에서도 점주(店主), 지 배인, 점원이 입는 기모노가 달랐고, 농민 역시 지주, 자작농, 소작농 등 신분과 위치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면, 시로모쿠(白無垢:하얀 색의 옷, 대개 비단을 사용한다)는 귀족이나 다이묘의 적자(嫡子)가 입었으며, 일반 대중은 마(麻)나 면으로 된 기모노를 착용했다. 그 러나 조닌도 부유해지면서 시로모쿠를 입게 되고, 또한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양복을 입게 되자 복장에 의해 신 분을 구분하는 구습(舊習)은 사라졌다. 오늘날 남자는 특 수한 직업을 가진 사람 즉 가부키 등에 종사하는 예술인 이나 스모 선수 등이 기모노를 입고 일반인들은 결혼식, 마쓰리, 장례식 등의 행사복으로 입는 경우가 많고 평상 복으로는 거의 입지 않는다.

기모노는 종류가 다양하며 각각 고유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 ♢ 도메소데(留袖) : 기혼여성이 입는 예복, 검은 바탕에 좌우 옷자락에만 무늬가 들어 간 구로도메소데(黑留袖)와 분호으 파랑 등 갖가지 색에 무늬를 넣은 이로도메소데(色 留袖)가 있다. 전자는 결혼식때 양가 부모가 격식을 갖춘 옷으로, 하얀 천을 빨강, 청색 의 순으로 몇 번이고 물들여 깊이있는 검은 색을 띠도록 만들며, 주로 사군자나 길조를 나타내는 문양을 사용한다. 그리고 후자는 친족 이외의 결혼식이나 축하 행사때 입는 예복으로 색이 곱고 화려하며 무늬가 다양하여 널리 애용되고 있다.

♢ 후리소데(振袖) : 후리소데는 미혼여성이 입는 예복으로 기모노 가운데 가장 화려하 다. 주로 성인식이나 사은회, 결혼식 등에 입는다. ♢ 호몬기(訪問着) :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입는 외출용 기모노로 연령이나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입학식이나 피로연, 파티, 다과회 등 어느 정도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도 입고 나갈 수 있다. 동일한 모양의 무늬가 반복되는 감으로 만든 것이 많지만, 무늬가 옷자락에서 소매, 어깨, 옷깃으로 이어져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보이는 것도 있다.

♢ 쓰케사게(付け下げ) : 호몬기보다 편하게 입는 약식 예복이다. 전쟁 중에 화려한 복 식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고안되었다고도 하며, 전쟁 후 물자 절약을 위해 간소하게 만 들어졌다는 말도 있지만, 실상은 근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이다. 호몬기와 비슷하지만 무늬 배치가 어깨, 소매, 깃 등에 독립된 문양이 있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이로무지(色無地) : 지리멘(縮緬:오글쪼글한 비단) 또는 무늬가 들어간 천에 물을 들 여 만든 글자 그대로 전체적으로 문양이 없는 기모노이다. 검은 색은 상복으로 입을 수 있으며, 문양이 있으면 약식 예복이 된다.

♢ 고몬(小紋) : 쇼핑, 맞선, 가벼운 파티 등에 입고 나가기에 가장 적절한 옷으로 평상 복으로 많이 입는다. 무늬가 작으며 기모노 가운데 가장 캐주얼하다고 할 수 있다.

♢ 쓰무기(紬) : 원래 양잠가에서 출하할 수 없는 누에고치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잠 시 외출하거나 주로 집에서 일상적으로 입는 옷이었으나, 최근에는 고몬과 같이 캐주 얼한 사교복으로 입는 경우도 있다.

♢ 모호쿠(喪服) : 영결식이나 오쓰야(お通夜:상가에서 밤을 새는 일) 등에 참석한 친족 이 주로 입는 옷으로, 무늬가 없는 검은 천에 이쓰쓰몬(五쓰紋:등과 좌우의 소매, 가슴 양쪽에 각각 하나씩, 모두 5개의 家紋)을 넣는 것이 정식이다. 또한 고인에 대한 예의 를 갖춘다는 뜻에서 오비(帶:폭이 넓은 허리띠)까지도 검은색으로 통일해야 한다.

기모노는 이렇듯 여러 종류가 있고, 쓰이는 문양에도 의미가 담겨 있으며 때로는 가문 (家紋)을 새기기도 한다. 가문은 헤이안 시대 황족과 귀족 사이에서 생기기 시작했으며 무사계급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정비되었다. 근대 이후 귀족과 무사 그리고 부유한 상 인들이 가문을 새긴 기모노를 입기 시작했고, 그로써 집안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기모노에 쓰이는 문양으로 많이 쓰이는 동물문양은 나비, 도미, 새, 잠자리, 사슴, 토끼, 공작, 사자, 용, 봉황, 학, 거북 등이 있다. 나비 문양은 아름답게 자라게 해달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봉황과 학은 불로장수를, 도미는 경사스러운 일이 있음을 의미한다. 식물 문양은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오동나무, 난초, 국화, 작약 등인데, 매화나무는 경 사스러움, 사군자인 매란국죽은 품위와 덕행을 갖춘 사람을 상징한다. 그리고 도구 문 양으로는 우마차, 배, 바퀴, 부채, 데마리(水毬:공과 같은 놀이기구) 등이 있으며, 부채 는 미래의 출세, 데마리와 우마차는 화려함과 고귀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양 외에도 산, 폭포, 구름, 태양, 달, 강, 눈, 안개와 같은 문양들이 있다. 또한 원이나 삼각형, 사 각형 등 기하학적인 모양을 사용한 추상적인 문양도 있다.

기모노는 이처럼 다양한 종류와 특성, 문양을 가진 일본문화이다. 그런데도 기모노를 여성용으로 여기 는가 하면, 속옷을 입지를 않아 허리띠를 풀면 알몸 이 드러난다거나, 오비를 묶을 때 등뒤에 장식용으 로 매듭을 짓는 오타이코( 太鼓)가 베개나 허리받침 용으로 고안되었다는 얘기가 무성하다. 그러나 이는 유카타(浴衣)와 혼동에서 비롯된 것으 로 오늘날 기모노를 입을 때 속옷을 입지 않은 사람 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유카타는 유카타바리(湯烽 子)가 변한 것인데, 온천이나 더운 목욕물을 가리키 는 유(湯)와 얇은 홑옷을 뜻하는 가타비라(烽子)의 복합어로 헤이안 시대 귀족들이 목욕을 마치고 물기 와 땀을 빨아들이기 위해 걸쳤던 마(麻)로 만든 가운 비슷한 옷이다. 유카타 자체가 속옷이었기 때문에 유카타 안에 속옷 을 따로 입을 필요는 없었고, 무사 계급 또한 유카타 를 입고 외출하는 경우는 없었다. 오늘날에는 외출 용 유카타가 따로 있는데 이때는 반드시 속옷을 입 는다.

☐ 스모 스모(相搏)가 일본의 국기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09년 료고쿠 국기관 개 막식때, 작가인 에미 스이인(1870~1934)이 축사를 썼는데, 이 축사에서 처음으로 ‘스모가 일본의 국기’ 라는 말이 언급되었고, 그때부터 비로소 사람들이 스모를 국기로 여기게 된 것이다. 스모의 존재가 문자로 기록된 것은 8세기초에 편찬 된 ‘일본서기’에, 제35대 고교쿠 천황(641~645)이 백제에서 보낸 사신을 대접하기 위해 궁정 위사(衛 士)들에게 스모 시합을 해보이게 했다고 한다. 그전 까지는 스모는 본래 한해 농사의 길흉을 점치기 위 해 민간에 널리 보급된 일종의 제신 의식이었다. 각 마을의 역사(力士)를 뽑아 공개된 장소에서 서로 힘 을 겨루도록 하고, 시합에서 승리한 역사가 속한 마 을이 하늘의 보살핌을 받아 그해 농사에서 풍작을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8세기 나라 시대 중기부터는 천황의 주도 하에 조정 의 귀족들도 해마다 칠석날이 되면 스모를 즐기며 놀았고, 헤이안 시대인 821년 제52대 사가 천황은 아예 스모를 궁중의 중요한 의식 가운데 하나로 지 정해, 활쏘기, 말타기와 함께 ‘산도세치(三度節’라 불렀다. 궁중 안에서 ‘구니우라 (國占:국가적으로 행해지는 점)’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스모가 매우 성대한 의식으로 치루어져 당일 진행 순서는 물론 사전 준비도 매우 복잡했다. 궁중의 중요한 의식이 된 후로는 스모는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는 등의 거친 행위를 지양하고, 오로 지 힘과 기술만으로 승부를 가리는 현재 스모의 형 태로 변하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 이후 사무라이들이 통 치한 가마쿠라 시대에 궁중의 화려한 의 식이었던 스모는 사무라이 계급의 실전 무술의 훈련법이 되었고, 유명한 스모 역사들 가운데 사무라이가 되어 전쟁터 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사람들도 나타 났지만, 대부분 스모 역사들은 사무라이 보다는 낙향해 제례에서 스모로 점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궁중 스모 의식의 여러 법도 가 일반 농민들에까지 전파되었다. 가마 쿠라 시대 이후 약 4백년 동안 스모는 사무라이와 농민들이 함께 즐기는 오락 이었다.

에도시대 바쿠후의 권력 기반이 탄탄해지 면서 사람들이 천하태평의 달콤함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스모 역시 또 한 차례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성행하던 스모는 ‘칸진스모(勸進相 搏)’로, ‘칸진(勸進)’이란 절을 짓거나 다 리를 새로 놓는 등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 한 행사를 의미한다. 이는 번화한 거리의 한복판에 푯말을 세우거나 깃발을 꽂아두 고 스모 시합을 하면 구경꾼들이 그들에 게 동전을 던져주는 방식이었다. 이 시합은 또 구경하던 사람이 즉석에서 등록하고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합이라지만 서로 치고 받는 격투기여서 막판에는 피를 보아야 끝이 나곤 하였다.

스모로 인한 소란과 사건을 참다못한 바 쿠후는 1648년 스모금지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랫사람들은 번화한 중심가에서 교외로 옮겨 스모를 계속 하 였다. 그로부터 13년후 바쿠후는 다시 한번 금 지령을 내렸고 이번에는 강력하게 대응하 자, 1684년, 전문 스모 역사였던 이카즈 치 곤다유가 스모장의 씨름판인 ‘도효(土 俵)’와 48가지 기술, 각종 반칙 등의 규정 을 정해 즉흥적으로 시합에 참여할 수 없 도록 하자, 바쿠후도 비로소 금지령을 철 수하였다. 하지만 절 안에서만 시합을 해 야 한다는 제한 규정을 두었다. 이 일은 스모 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 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그후 전문 역 사들은 반드시 특정 스모 단체에 속한 신 분으로만 시합에 참여할 수 있었다.

1868년 메이지 정부의 출범 후 11월 스모 대회가 성대하게 개막되었지만, 모든 것 을 서양의 방식대로 바꾸던 신정부가 ‘나 체로 하는 야만적인 놀이’라는 이유로 메 이지 6년에 다시 스모 금지령이 내려졌다.

양복을 입고 서양의 왈츠를 배우던 대부 분의 젊은 관리들도 ‘시대에 부합하지 않 는 벌거벗고 추는 춤’이라며 비난하였으 며, 언론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러한 스 모 배척론은 메이지 시대 중기까지 이어 졌다.

지금은 스모가 세계적으로 공인된 일본의 국기이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숱한 부침 과 영욕을 겪을 대로 겪은 결과임다. 전통 문화나 어떤 장기, 기술 등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대중들에게 지 지를 받아야만 그 생명력이 있다고 할 것 이다.

☐ 게다 게다는 나무로 만든 신발이다. 적당한 두께의 나무를 발의 크기, 용도에 맞추 어 잘라 밑창에 이자(二字) 모양의 홈 을 파서 나무 날을 끼어 넣어 만든 것 도 있고,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도 있 다.

게다는 집안은 물론 밖에서도 신는 평 상용 신발이지만, 나들이나 정장용 신 발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원래 맨발 에 신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와 유카타는 서로 짝을 이루며 일 본인들에게 향수를 일으키게 한다. 장 마철의 끈끈한 날씨에 유카타를 입고 게다를 신고 선선한 저녁바람을 쏘이 며 기분전환을 한다. 이때 다비(足袋: 일본식 버선)를 신은 사람은 없다.

게다의 종류 1. 고마게다(駒下駄) : 통나무를 깎아 속을 파서 만든다.

2. 초호케이(長方形) : 직사각형으로 게다의 원조라고 할 수 있 다.

3. 다마고게다(卵形) : 사방의 각진 부분을 깎아 둥글게 만든 것 으로 교토 지방에서 개량한, 발달된 스타일의 게다이다.

4. 니와게다(庭下駄) : 원칙적으로 집안의 마당에서만 신는다. 둥근 것, 각진 것, 타원형 등 모양이 다양하다.

5. 봇구리게다(ぱっくり下駄) : 주로 어린 여자아이들이 새옷을 입고 신는 게다.

6. 노메리게다(のめり下駄) : 게다 앞 부분이 점차적으로 얇아 지도록 비스듬하게 깎아 만든 것. 게다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아 이들이 신는다.

7. 시구레게다(時雨下駄) : 비 또는 눈이 내리는 궂은 날에 신는 것으로 유키게다(雪下駄)라고도 한다. 발끝이 젖는 것을 막기 위한 덮개가 달려 있으며, 일반적인 게다보다는 딛는 날이 높아 서 다카게다(高下駄)라고도 한다.

실제로 게다를 신는데는 매우 까다로운 격식이 있지 만, 기본적인 것은 봄이나 여름에는 맨발에 무늬가 있 거나 색칠을 한 것을 신으며,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다 비를 신고 무늬를 새기거나 색칠을 하지 않은 나무로 만든 것을 신는다.

게다에 비해 조리 는 외출용, 나들이용 신발이다. 조리 를 신을 때는 와후쿠(和服)를 입으며 시로다비(白足: 하얀 버선)를 신는 것이 원칙이다.

남의 집 방문시 에티켓 1. 들어간 방향 그대로 등을 보이지 않고 신을 벗는 다. 현관 한가운데를 피하고 약간 옆으로 비켜 들 어가서 무릎을 반쯤 구부리며 현관 쪽으로 몸을 틀고, 들어온 방향을 향해 신을 돌려 놓는다. 이를 ‘데후네가타(出船型)’로 놓는다‘라고 한다.

2. 뒤로 돌아서서 신을 벗고 들어가는 것은 실례이다. 데후네가타를 알고 있는 젊은이가 뒷걸음질치면 서 신발을 벗는 경우가 있는데, 남의 집안 쪽에 엉 덩이를 향한 채 들어가는 것은 큰 실례가 된다.

☐ 와가시 일본에는 다양한 축제와 연중행사가 있다. 이들 행사에는 생활 속에서 발전하여 전통이 된 음식 들이 많이 등장한다. 아이의 출생이나 생일, 입학 등의 경사스러운 날은 대개 세키한(赤飯:찹쌀 팥 밥) 을 만들고, 장례식에 온 손님에게는 만쥬(饅 頭 まんじゅう) 를 대접하는 등 대접하는 등 음식 과 명절 및 애경사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 다.

일본 명절과 관련된 다양한 먹거리가 있지만 그 가운데 절대 빼놓을 수 없는게 와과시(和菓子)이 다. 와가시를 접하면 누구나 두 번 놀란다고 한다. 처음에는 과자의 모양과 색이 매우 아름다워서 놀라고, 다음에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단맛 에 다시 놀라는 것이다. 이는 일본인이 자주 마시 는 녹차의 떫고 쓴맛을 당분이 중화시켜 주기때 문이라고 한다.

와가시란 말은 1867년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에 서 들어온 양과자와 전통 과자를 구분아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일상적으로는 떡, 가자, 찐빵 등을 총칭하는 ‘오카시(お菓子)’ 라는 말을 사용 한다. 이 밖에 값싼 허드레 과자로 子)’ 라는 것이 있다.

‘다가시(駄菓 일본인은 와가시를 ‘식문화의 꽃’이라고 하는데, 이는 ‘ 데쓰쿠리 :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의 매력에 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데쓰쿠리의 매력은 만드는 사람 자신이 느끼고 표현하고자 하는 감 성을 충실히 살려 독특하고 섬세하게 만들 수 있 다는데 있다. 이처럼 와가시는 만드는 사람의 느 낌과 표현에 따라 색이나 형태, 크기 등이 다양하 게 만들어진다.

특히 가업으로 대를 물려 과자를 만들어온 장인들에 전통을 잇고 있는데, 그들 은 무엇보다 계절감을 소중히 여긴다. 장인들은 그 계절에만 생산되는 재료를 사용하여 와가시를 만들거나, 또는 같은 재료라도 여름에는 초록의 잎으로, 가 을에는 붉은 단풍으로 만드는 등 자연의 풍물을 투영하여 표현함으로써 계절감 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와가시의 주재료는 찹쌀이나 멥쌀, 조, 수수, 밀, 보리, 메밀 등의 곡류와 고구마, 감자, 한천, 칡, 쑥 등이다. 소(素)로 사용하는 것은 팥과 콩이 가장 일반적이고, 깨나 단호박을 쓰기도 한다. 부재료는 밤, 귤, 감, 사과, 배 등의 과일이 있으며, 단맛을 내기 위해 다양한 설탕과 당밀, 꿀 등을 사용한다. 그 밖에 향신료로 박 하, 계피, 생강 등을 쓴다.

와가시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나마가시(生菓子) : 수분이 많은 편으로 상미(常味) 기간이 짧다. 떡, 찐빵, 국화빵 종류 히가시(干菓子) : 수분이 거의 없으므로 상미 기간이 길다. 틀에 넣어 굳히거나 설탕에 재어 건조시킨 전병, 엿 종류 가 이에 속한다.

한나마가시(半生菓子) : 마가시와 히가시의 중간 형태. 모 나카, 요캉 등 또 대표적인 와가시는 다음과 같다.

사쿠라모치/카시와모치/오하기/만쥬/아이후쿠/단고(團 子)/도라야키/규히(求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