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_영화와_두_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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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러시아 영화와 두 도시 이야기

1.

모스크바

:

글로벌과 글래머 사이

2.

상트페테르부르크

:

유동하는 도시

제 1 강

모스크바

:

글로벌과 글래머 사이

 1991 년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 새롭게 도입된 시장경제체제는 수도 모스크바의 문화적 , 사회적 풍경 변화에 심대한 영향을 끼침 .

 시장경제로 체제전환이 급속히 이뤄지면서 도시의 물리적 외관도 우중충한 사회주 의 색채를 벗고 다채로운 자본주의 빛깔을 띠기 시작함 .

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스크바 중심가 곳곳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우후죽 순처럼 나타난 자본주의 소비상품의 전시와 광고에서 확연하게 드러남 .

 과거 이 자리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대표했던 레닌 , 마르크스 , 스탈린 등의 대형 초상 화나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찬란한 미래를 약속했던 각종 표어가 내걸려 있었지만 , 소 련 붕괴 직후 시장경제체제가 전격 도입되면서 모스크바 표면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짐 .

 그 대신 ‘지금 여기’의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소비 자본주의의 화려한 상품 이미지들 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오면서 도시의 외양도 나날이 달라짐 .

 소비에트 체제 해체 이후 모스크바 도시 외관에 새롭게 새겨진 시장경제와 소비 자 본주의의 얼굴은 1990 년대 러시아에 상륙한 세계화 물결을 타고 더욱더 다채롭게 변모 함 .

 모스크바의 역사적 , 전통적 면모는 세계화 경향으로 말미암아 도시개발 과정에서 관심의 뒷전으로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반면 , 글로벌 대도시의 위상 제고를 뒷 받침하는 현대성의 세련된 이미지가 포스트소비에트 시대 모스크바의 도시 풍경에서 새로운 중심을 차지함 .

 이러한 모스크바 도시 풍경의 중심 이동은 1990 년대 후반 착수되어 지금까지 10 여 년 동안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되고 있는 국제비즈니스센터 ‘모스크바 시티’ 건설 현장 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남 .

 초고층 건물들이 대규모로 밀집해서 ‘도시 속의 도시’로 불리는 ‘모스크바 시티’는 국제 금융자본의 허브와 첨단 현대생활의 중심을 동시에 지향하면서 모스크바의 글로 벌 대도시 이미지를 강화하고 대표함 .

 2000 년대 푸틴 시대에 들어와서 러시아 경제가 오일 달러에 힘입어 상대적 안정을 찾으면서 모스크바의 도시 풍경과 일상생활도 다시 한 번 커다란 변화를 맞이함 .

 특히 이 시기 러시아 사회를 강타한 소비주의와 글래머 문화의 초호화 이미지 속에 서 모스크바는 마침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최첨단을 달리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대 도시 대열에 동참함 .

 실제로 ‘누구든지 더 낫고 , 매력적이며 , 풍족한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동적이 고 상업적인 사회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는’ 휘황찬란한 글래머 이미지의 범람은 21 세 기 모스크바가 ‘자본주의의 매혹과 욕망의 언어’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소비의 사회’ 임을 명시적으로 보여줌 .

 포스트소비에트 시대 20 년 동안 모스크바 도시의 상전벽해 같은 변화는 이처럼 글 로벌과 글래머 사이에서 숨 가쁘게 진행됐는데 , 이런 변화의 다양한 양상과 중요한 의 미는 영화 매체의 시각 이미지를 통해서 가장 명징하게 드러남 .

< 글랴네츠 >

 < 글랴네츠 > 는 콘찰로프스키가 그의 창작 이력에서 새롭게 선보인 작품의 내용과 형식으로 현대 러시아 영화와 대중문화의 측면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님 .

 제목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듯이 ,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먼저푸틴 시대에 소비문화의 바람을 타고 러시아에 상륙한 서구식 글래머 현상을 정면으로 취 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심장함 .

 영화 서사의 내용에서 < 글랴네츠 > 는 러시아 상류사회의 중심세력을 형성 하고 있는 ‘노브이 루스키’나 ‘올리가르흐’들의 무분별한 소비행태나 행동거 지는 말할 것도 없이 패션 , 광고 , 사교계 파티 , 대도시의 현란한 외관 등 이들 을 둘러싸고 있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상 , 소비로 이끄는 현실의 연출 되고 구성된 이미지들로 가득함 .

 글래머 현상과 관련하여 < 글랴네츠 > 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이 영 화 속에 신데렐라 동화의 원형적 모티프가 현대적으로 변주되어 있다는 점임 .

 이는 로스토프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시골뜨기 처녀인 여주인공 갈랴가 수도 모스 크바로 무작정 상경하여 갖은 우여곡절 끝에 ‘루블료프카 아가씨’처럼 올리가르흐의 부인이 되는 행운을 얻어 마침내 가난한 삶 속에서도 항상 동경해 마지않던 아름답고 행복한 삶의 이상을 실현하게 된다는 영화 서사의 내용 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음 .

 실제로 갈랴는 로스토프 나 도누의 가난한 집안에서 부권을 완전히 상실한 주정뱅 이 늙은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인간 이하로 매몰차게 취급하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평소 TV 와 잡지 광고를 보며 동경했던 패션모델이 되기 위해 대도시 모스크바로 떠남 .

 모스크바에서 갈랴는 패션 디자이너의 하찮은 도우미로 일을 하게 되는데 , 이 과정 에서 할리우드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를 닮은 외모 덕분에 그녀는 우연히 패션 사진 작가의 눈에 띄어 백만장자 올리가리흐의 부인이 되는 행운을 거머쥐면서 모델로서도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처럼 보임 .

 이 영화는 여주인공 갈랴가 영화 서사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자신의 남편이자 올리 가르흐인 클리멘코의 보디가드로 예기치 않게 나타난 옛 남자친구 비초크에게 비정하 게 살해된다는 점에서 동화의 행복한 결말에 대한 관객의 일반적 기대지평을 여지없이 무너뜨림 .  이렇게 허무한 비극적 죽음과 함께 끝나는 영화 서사의 공식 종결 이후 보너스로 제 시되는 장면들에서 여주인공 갈랴가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내는데 , 이때 그녀는 할리 우드의 유명배우에서 모나코 대공 레니에 3 세의 공비로 더욱 화려하게 탈바꿈한 현실 속 신데렐라 그레이스 켈리를 그대로 모사한 듯이 단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구성된 사진의 인공적 이미지로 제시됨 .  갈랴는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자신의 실제적 본질을 상실한 채 오직 허구적 사진 이 미지로만 남아 기계 복제되어 광택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며 확대 재생산되는데 , 이는 실체보다는 매끈한 인공과 가상의 장식적 표면에 더 열광하고 집착하는 동시대 러시아 사회의 경박한 소비문화 풍조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판임 .

제 2 강

상트페테르부르크

:

유동하는 도시

 포스트소비에트 시대 20 년 동안 ‘ 북방의 수도 ’ 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 한 변화 가운데 한 가지는 1991 년 소련 붕괴 직후 시민 투표로 확정된 도시 이름 변경에 서 찾을 수 있음 .

 소련 시대 70 년 동안 익숙했던 ‘ 레닌그라드 ’ 에서 원래의 ‘ 상트페테르부르크 ’ 로의 개명은 두 세기 이상 제국의 수도로 기능했던 페테르부르크의 영광스런 기억에서 소련 의 어두운 그림자를 털어내고 도시 본연의 역사적 , 문화적 뿌리를 되찾고자 한 시도임 .

 페테르부르크는 천국이었던 동시에 지옥이었고 , 유토피아의 이상 도시이자 반그리 스도의 사악한 가면으로 , 이러한 이중성은 과거 러시아 제국에서 ‘ 중심 ’(center) 이었던 동시에 ‘ 주변 ’(periphery) 이었던 페테르부르크의 위상학적 역설로도 잘 설명됨 .

 개명 이후에도 페테르부르크는 소비에트 시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주변적 상태로 만 머물러 있었고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급격한 체제전환과 함께 일어 난 1990 년대 러시아의 사회 · 경제적 혼란상은 페테르부르크 도시 위상에서는 물론이고 , 도시 공간과 생활 세계에서도 주변화 (marginalization) 현상을 더욱더 부채질하기만 함 .

 ‘ 페테르부르크 신화 ’ 를 특징짓는 부정적 자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도시 공간과 생활 세계의 혼란상이 주변화나 파편화 현상과 함께 1990 년대 포스트소비에트 ‘ 러시 아 영화의 페테르부르크 텍스트 ’ 를 압도적으로 지배했음 .

 1991 년 소련 붕괴와 도시 개명 이후 1993 년에 나온 유리 마민의 영화 < 파리로 향한 창 > 에서부터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 여기서 페테르부르크 도시 공간과 생활 세계의 혼 란상은 쓰레기가 넘치고 악취가 진동하는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운 거리 , 누추하고 낡아 빠진 건물 , 비좁고 어두운 집안 등이 대표함 .

 영화 속 벼룩시장은 도시 공간과 생활 세계의 주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데 , 이는 4 년 뒤 1997 년에 나온 알렉세이 발라바노프의 영화 < 형제 > 에서도 공동묘지와 함께 페 테르부르크 도시 공간의 주변화를 표상함 .

 1990 년대 러시아 영화에서 페테르부르크 도시 공간은 주변화 또는 파편화 경향을 강하게 띠면서 질서보다는 혼돈 , 삶보다는 죽음의 분위기가 엄습하는 ‘ 반 공간 또는 빈 곤과 굶주림 , 알코올 중독으로 가득한 ‘ 반 세계 ’ 의 부정적 이미지로 제시됨 .

< 산책 >

 소련 붕괴 이후 페테르부르크 역사에서 원래 이름의 회복만큼이나 의미심장한 사건 은 2003 년 도시 창건 300 주년 기념식이었음 .

 페테르부르크 시 정부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여 1990 년대와는 다른 도시 이미지 를 재개발 또는 재발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 핵심은 풍부한 문화유산을 적극 활용하여 페테르부르크를 21 세기형 글로벌 관광 도시로 변화시키는 것이었음 .

 페테르부르크 도시 공간과 생활 세계는 소련 시절이나 1990 년대에 보던 우중충하고 쇠락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산뜻하고 활기차고 풍요로운 면모를 띠기 시작함 .

 2003 년 창건 300 주년 전후로 나온 러시아 영화에서도 페테르부르크 도시 공간이 이 전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였는데 , 이 시기 영화에서도 1990 년대 영화에서처럼 페테르부 르크의 어두운 이미지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 도시의 화려하고 활기차며 역동적인 스펙 타클 이미지가 알렉세이 우치텔의 < 산책 > 에서처럼 2000 년대 푸틴 시대 ‘ 페테르부르크 영화 ’ 에 처음 등장한 것은 분명히 놀라운 변화였음 .

< 산책 >

 우치텔의 영화 < 산책 > 에서는 21 세기 페테르부르크 도시 공간이 고골의 소설 < 넵스 키 대로 > 에서처럼 도시민 산책자가 일상생활 속에서 보고 보이고 속고 속이는 관찰과 관조의 ( 기만적 ) 무대 공간으로 다시 한 번 나타남 .

 게다가 이러한 공간에서는 시선을 중심으로 지배와 통제 , 경쟁과 투쟁의 인간관계 가 고조되는데 , 이는 올가를 가운데 놓고 교차하는 알렉세이와 페차 , 프세볼로드의 남 성적 시선 , 그녀를 놓고 벌이는 경쟁 관계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으며 , 이들이 거리에 서 마주치는 ‘ 제니트 ’(Зенит) 축구팬들 사이의 옥신각신하는 다툼에서도 암시적으로 뒷받침됨 .

 이런 점에서 < 산책 > 의 ‘ 산뜻한 페테르부르크 ’ 는 범죄 , 폭력 , 살인 등으로 점철되는 알렉세이 발라바노프의 ‘ 어두운 페테르부르크 ’ 와 피상적으로는 크게 다르면서도 본질 에서는 거의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

두 영화 속에서 페테르부르크는 경쟁과 투쟁의 세 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일한 의미로 수렴된다 .

< 산책 >

 포스트모던 모바일 도시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모든 것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 이런 양상은 도시 생활에서 나타나는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를 둘러싼 유동적 세계로도 확대됨 .

 < 산책 > 에서 여주인공 올가는 모바일 도시 공간의 이동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 그 와 동시에 도시 공간과 생활 세계 속 인간관계의 사회적 유동성을 대표함 .

 올가는 다양한 층위에서 서로 다른 세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탈경계성을 보여줌 .

 < 산책 > 은 21 세기 페테르부르크의 유동적 세계를 모바일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이 전과는 다르게 도시 공간의 새로운 경험 세계를 창조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