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주종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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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① 주종 관계

◈ 싸우는 사람, 기사
(1) 중세 초기의 유럽 사회 : 정치적 분열, 노르만 족의
이동과 이슬람의 침입으로 인한 사회 혼란 → 기사들
의 사회적 역할 증대
(2) 주종 관계의 성립
① 주종 관계:토지를 매개로 이루어진 기사들 간의 군
사적 상하 관계
② 특징:주군(군사적 보호)과 가신(충성과 군역)의 쌍
무적 계약 관계
(3) 지방 분권 체제
① 왕권의 약화:국왕은 자신이 직접 다스리는 지역에만
통치권 행사
② 지방 분권화(불입권):영주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군
대 소집권, 재판권, 조세 징수권 등을 독립적으로 행
사
◈ 일하는 사람, 농노
(1) 장원 제도
① 장원1):기사들이 받은 봉토 → 자급 자족적인 농촌
공동체
② 기사:장원의 영주로서 전쟁이나 통치 활동에만 전념
③ 농노1):장원에 예속된 농민 → 이동의 자유가 없음
▶힘든 부역과 혼인세, 사망세 등 각종 잡세 납부
▶결혼 가능, 집과 토지, 농기구 등의 사유 재산 소유 →
노예와의 차이
(2) 봉건 제도(기원)
① 특징:주종 관계와 장원 제도의 결합 → 지방 분권 체
제
② 발달 과정:8~9세기경 형성 → 10~13세기 프랑스
중심으로 정착(농업 발달, 국왕의 영향력 미약)
◈ 기도하는 사람, 성직자
(1) 크리스트 교의 발전
① 정치적 구심점:지방 분권화된 서유럽 사회의 유일한
구심점
② 경제적 토대:많은 토지와 각종 세금 수입 → 막대한
부 축적
③ 조직 체계의 확립:교황 → 대주교 → 주교 → 일반
사제 등
(2) 교회의 세속화 1) 2) 3)
① 성직 임명권:세속 지배자가 보유 → 성직 매매 성행
② 교회의 부패:교회의 세속화, 규율과 기강 붕괴 → 수
도원을 중심으로 교회 개혁 운동 전개
(3) 교황권의 확립
① 카노사의 굴욕(1077) 사건: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교황 그레고리 7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
4세의 대립 → 황제의 굴복
② 교황권의 전성:13세기 무렵에 절정 → 종교뿐만 아
니라 세속 정치, 일상 생활에도 절대적인 영향력 행사
(‘교황은 해, 황제는 달’-인노켄티우스 3세)
(4) 그리스 정교의 발전 : 비잔틴 제국과 동유럽 중심, 전
통적으로 세속 지배자가 성직 임명이나 종교 회의 소
집 등을 주도
◈ 중세 유럽의 문화
(1) 크리스트 교 중심의 문화 : 정치, 학문, 사상, 예술 등
모든 분야의 기준
(2) 신학 : 모든 학문의 중심, 크리스트 교리의 이론적 설
명 → 토마스 아퀴나스(신앙과 이성의 조화 시도,
『신학대전』저술)
(3) 건축 : 고딕 양식 → 중세 유럽 사람들의 신앙심 반영
(뾰족한 탑과 오색 찬란한 색유리창)
(4) 학문과 교육
① 중세 초기 : 교회나 수도원에 부설된 학교에서 담당
② 11세기 이후 :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로 유럽 각지에
대학 설립 →새로운 학문 연구와 교육의 중심지로 성
장
(5) 문학 :『아서 왕 이야기』, 『롤랑의 노래』, 『니벨
룽겐의 노래』등의 기사문학 유행
용어정리
● 기사 : 기사는 카롤링 왕조 시대 이래 전술이 전환되
면서 나타났다. 즉, 군대의 주력이 보병에서 기병으로 전
환되면서 나타난 중장 기병 전사를 가리킨다. 이들은 봉
건 사회에서 군사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기사도는 봉건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
되었다.
● 쌍무적 계약관계 : 주군은 가신과 그의 봉토(토지)를
보호하고, 가신은 주군에게 충성과 군사적 봉사, 경제적
지원의 의무를 졌다. 주군의 맏아들이 기사로 서임되거
나 주군의 장녀가 결혼할 때에는 경제적 부조를 바쳐야
했다. 이 관계는 자유로운 계약 관계로서, 어느 한쪽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었다. 그
러나 중국 주나라에서는 혈연을 매개로 봉건 관계가 성
립하였다.
● 불입권 :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에 대해 독자적인 통치
권을 가지고 있어서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는데. 이를
불입권이라고 한다. 그러나 힘이 미약한 영주의 경우에
는 중죄 결정을 유력한 봉건 제후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 지방 분권 체제 : 정치 권력이 중앙 정부에 집중되지
않고 지방에 분산되어 있는 체제
● 장원 : 장원은 대개 하나의 촌락으로 성립되는 것이
보통이다. 장원의 경작지는 울타리가 없이 개방되어 있
어서 영주 직영지와 농민 보유지가 서로 섞여 있었다. 그
것은 농기구가 부족하여 공동 작업을 해야 했고, 자연 재
해로 수확량이 줄어들 경우 어느 한 사람에게만 그 부담
을 지우지 않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편 중세에는 비
료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작지는 대개 2포제나 3
포제 방식으로 운영되어 토지의 생산력을 높이고자 했다.
● 3포제 : 영주가 직영하는 땅이든 농민 보유지이든 모
두 3개의 경작 구간으로 나누어 한 곳에는 봄에, 또 한곳
에는 가을에 농사를 짓고, 나머지 한 곳은 농사를 짓지
않는 휴한지로 두었던 농업 방식. 농민 보유지와 영주 직
영지 모두 농사 일은 농민의 공동작업에 의해 실시되었
다.
● 봉토 : 주군이 자신의 가신이 된 기사에게 지급하는
토지
● 농노 : 영주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노동과 현물을 제
공하던 존재였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었고, 토지
와 약간의 농기구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봉건 영주
의 허락 없이는 장원을 떠날 수 없어 평생을 장원에 얽매
여 살아야 했다. 노예보다는 조금 나은 처지이나 지금 농
민들과 비교하면 거의 자유가 없는 셈이다.
● 영주의 생활 : 영주는 성 안의 모든 일을 결정하고 책
임졌다. 즉, 성의 건축이나 증축의 결정, 방비 태세의 확
립, 토지의 효율적 관리 등의 양피지에 기록된 중요 사항
에 대해 최고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분쟁이 일어났
을 때 재판을 하고 약소 영주나 기사들을 감독했다. 또,
성직자에게는 기부금이나 연금을 주어 종교를 보호하였
다. 영주의 일과 중 아침의 몸치장은 매우 중요하였다.
유행에 따라 턱수염이나 콧수염을 기르기도 했는데 대개
는 깨끗이 깎았다. 머리를 손질하고 향수를 뿌렸으며 고
급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그런데10세기 까지도 영
주는 읽고 쓰는 것도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문화가 보급
됨에 따라 점차 교양을 쌓아 시를 쓰거나 작곡을 하였고,
가문과 지방의 역사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 자기 지방
의 예술가들 보호했고 다른 지방의 예술가들을 앞다투어
초청하였다.
● 부역 : 조세를 현물이나 화폐 대신 노동력으로 지불
● 노예 : 주인에게 딸린 물건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사
유 재산이 있을 수도 없고 가정을 꾸릴 수도 없었으며,
사고 팔 수도 있었다. 즉 인간 이하의 존재였던 것이다.
고대 노예 신분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는 도구’
라고 말했다.
● 봉건제 : 오늘날 역사적인 개념으로 흔히 사용하고 있
는 봉건제(feudalism)는 대체로 중세 유럽, 특히 서유럽
에서 발달한 제도를 가리킨다. 유럽의 봉건제는
①군사적인 측면에서 봉(封; 토지, 가축 등 충성의 대가
로 지급한 재산)의 수수를 바탕으로 성립하는 기사들 간
의 주종관계,
②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농노제에 의해 경영되는 장원제
도,
③정치적인 측면에서 봉건 영주들의 불입권에 입각한 지
방 분권 체제를 특징으로 한다.
한편, 봉건제는 1990년대 초부터 중세 사회를 설명하는
개념으로서 서구 학계에서 그 한계가 자주 지적되어 왔
으며, 봉건제라는 용어를 피하기 위하여 중세 사회에 대
한 설명 방식 자체를 달리하는 경우도 있다.
● 봉건제의 기원 : 봉건제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으나, 대개 로마 말기의 은대지 제도와 게르
만족의 오랜 관습인 종사 제도가 결합된 것으로 보는 경
우가 많다.
은대지 제도란 로마 말기에 사회가 혼란해지자, 토지 소
유자가 유력자에게 자신의 토지를 헌납하고 그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의 토지를 다시 은대지로서 수여받고 지대를
납부하는 제도였다.
한편 게르만족의 종사 제도는 귀족이나 자유민의 자제
가 자유 의사에 따라 유력자의 종사가 되어 충성을 맹세
하고 그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것이다.
● 사유 교회 제도 : 중세 초기 봉건 영주들은 농민들이
살 만한 곳에 교회를 세워 촌락을 형성하였는데, 이를 사
유 교회 제도라고 한다. 이 때 봉건 영주들은 교회 설립
비용을 부담했기 때문에 사유 재산처럼 여겼고, 성직 임
명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다. 또, 1/10세 등 교회
의 수입도 고스란히 봉건 영주의 수중에 들어갔다. 로마
교회에서는 처음에 이를 묵인하다가 나중에 공인하였는
데, 9~10세기에는 서유럽에 있는 교회의 대부분이 그 영
향 아래 들어가는 등 폐해가 극심했다.
그 결과, 성직자들은 세속화되었으며 사유 교회 제도는
성직 임명권 투쟁의 불씨가 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을 중
심으로 교회 개혁 운동이 일어나자, 성직자들은 이 제도
를 폐지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봉건제가 소멸될 때까지
여전히 남아 있었다.
● 수도원 : 교회 개혁 운동의 중심은 청빈, 정결, 순종의
계율을 내세운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일찍이 4세기 무
렵 북아프리카에서 비롯되었지만, 본격적인 종교 공동체
로 성립시킨 사람은 이탈리아의 베네딕트였다. 그는 6세
기에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세우고, 엄격한 수도 생활을
주창하였다. 그 후 10세기 초에는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
으로 교회의 세속화에 반대하여 성직 매매 금지 등을 요
구하기도 하였다. 카노사의 굴욕 사건을 일으켰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도 바로 이 클뤼니 수도원 출신이었다.
한편, 수도원은 유럽이 게르만 족의 이동으로 문화적 정
체에 빠졌을 때 교육 사업을 펴고 고전 문화를 연구 하는
등 중세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또, 사회 봉사 등
을 통하여 참된 크리스트교 정신을 보여 주어 어두운 사
회의 등불이 되기도 하였다.
★ 사제들은 그들이 주재하는 성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천당에 갈 수 없다고 가르쳤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파문에 처하였다. 파문은 종교적 처벌에 불과하였으나,
중세 사회에서는 사형 선고나 다름 없는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중세 유럽 사람들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써 진정한 크리스트 교도가 될 수 있었으며, 혼인식도 교
회에서 올렸고, 장례 역시 교회에서 치렀다. 마을의 각종
모임이나 축제 등도 교회 안팎에서 열렸으며, 국왕의 포
고문이나 명령도 교회에서 공포되었다. 이처럼 중세 유
럽 사람들의 생활에서 교회는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것이
었다.
● 교황은 해, 황제는 달 : “우주의 창조주는 하늘에 두
개의 위대한 발광체를 두셨다. 그 중 강한 것은 낮을 다
스리고, 약한 것은 밤을 지배하기 위해서이다. 또, 신은
하늘 나라로 불리는 보편적인 교회의 넓은 하늘에도 두
개의 위대한 벼슬을 지정해 주셨다. 그 중 높은 쪽은 혼
을 다스리고, 낮은 쪽은 몸을 지배하기 위해서이다. 이
높은 쪽은 교황의 권위이다.
한편, 달은 그 빛을 태양으로부터 얻지만 사실 크기나
밝기가 태양에 뒤떨어진다. 이와 같이 제왕도 그 위엄을
교황에게서는 얻는데 그 권위의 영역에 다가가면 갈수록
제왕의 위엄을 빛내는 빛은 엷어지고, 멀어질수록 광채
를 띠게 된다.”
● 신학 : 크리스트 교 신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크
리스트 교 학자인 교부들이 그 바탕을 마련하였다.
★ 철학은 신학의 시녀 – 중세에는 교회의 교리가 절대
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점차 이를 학술적으로 입증하려
는 노력과 함께 그리스의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크리스트 교 교리를 좀더 체계화하려고
하였다. 이로써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실현
한 체계적 학문이 수립되었는데, 이를 스콜라(‘교회의 부
속 학교’라는 뜻) 철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학문의 주요
관심은 역시 신학에 있었으며, 철학은 ‘신학의 시녀’로
간주 되었다.
● 스콜라 철학 : 그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은 시대여서 주로 과학, 철학 등이 발전했
다. 하지만 중세 시대는 크리스트 교의 영향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보다는 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중세 초기
에는 초대 교회의 교리 확립에 힘쓰는 철학이 생겨났는
데, 이를 교부 철학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우
구스티누스인데, 그는 ‘참된 행복은 신과 하나가 될 때
가능하다.’고 했다.
그 후 형성된 것이 스콜라 철학인데, 이는 ‘교리를 철학
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철학을 뜻한다.
교부 철학이 신 중심이었던 데 비해 스콜라 철학은 신앙
과
이성의 조화를 꾀하였다.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
은 토마스 아퀴나스인데, 그는 ‘하느님과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삶이 행복한 삶이다.’라고 했다.
● 중세의 건축 양식 : 중세의 건축 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10~12세기)과 고딕 양식(12~15세기)이 주류를 이
루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을 변
형한 것으로, 십자형의 평면도에 두터운 벽, 반원형의 아
치가 있는 입구, 작은 창문 등 대체로 무겁고 어두운 인
상을 주었다.
반면, 고딕 양식은 늑골 궁륭과 부벽을 사용하여 지붕
의 무게를 줄이고 벽의 두께도 얇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또, 창문도 크게 만들 수 있었는데, 넓어진 창에는 화려
한 색유리를 장식하여 실내를 신비롭게 하였다. ‘높이와
의
싸움’이라고 일컬어지는 고딕 양식은 당시 봉건 사회의
안정과 교회의 지배력, 신앙심의 고조, 도시의 발달에 따
른 시민 계층의 경제력 상승 등을 반영하고 있다.
● 중세 대학 : 대학을 뜻하는 universitas는 원래 단체
나 길드를 의미했는데, 점차 학생과 교수(교수들의 조합
은 따로 college라고 함)들의 길드를 가리키게 되었다.
12세기에 이탈리아의 볼로냐와 프랑스의 파리에 세워진
대학이 그 시작이었다. 교회 학교에는 쟁쟁한 신학자들
이 모여 있었으므로, 학생들이 이들을 찾아오면서 대학
이 시작된 것이다. 중세의 대학은 국가나 영주 또는 교회
의 재판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재판권을 가지며 자치의
특권을 누렸다.
● 중세 문학 : 중세 문학은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라
틴어(중세 유럽의 공용어)문학과 자국어로 씌어진 속어
문학으로 크게 구분된다.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 속에서 문화
의 전통을 지킨 것은 수도원이었다. 수도사들은 해박한
라틴어 지식을 바탕으로 성자들의 전기와 역사를 저술하
였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았으
며, 금욕적·현세 부정적 경향이 강했고 민족성이나 지방
성도 배우 희박하였다. 속어 문학이 융성하게 된 것은
봉건제가 안정되고, 십자군 전쟁의 붐이 일어난 12세기
의 일로서, <롤랑의 노래>, <아서 왕 이야기>, <니벨룽
겐의 노래> 등이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은 주로 봉건 제
후의 취향에 맞는 영웅 서사시이거나 궁정의 로맨스였다.
농노들은 영주와
토지에 얽매여 이
동의 자유가 없어
평생 동안 고된
생활을 하였기에,
독일에서는 이들
을 ‘뿔 없는 소’라
고 부르기도 하였
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무릎
을 꿇은 채, 클뤼니 수
도원장과 카노사 성의
백작 부인에게 교황과
의 화해를 주선해 달
라고 간청하고 있다.
이탈리아 아사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색 유리창에는 대개 성인
들의 일대기나 성서의 내
용이 표현되었는데, 이는
대부분 문맹이었던 중세
사람들이 교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프랑스 랭스 대성당의
내부.
고딕 양식은 이전의 건
축 양식보다 천장이 가
벼워졌기 때문에, 건물의
벽이 얇아지고 창문도
커져서 교회의 내부가
휠씬 밝아졌다.
프랑스 사르트르 대성당.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탑은 고딕 양식의 큰
특징으로서, 중세 유럽인
의 신앙심을 상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