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자용 박사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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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조자용 박사님은

한국민화 수집기
인간만사(人間萬事)는
사람 잘 만나기에 달렸다는 말은 다시 없는 진리인것 같다.
내가 조선 민화를 알게 되고 열심히 모아서 이제 이 적은 컬렉션을 갖게 된 것은
오직 은인
조자용 박사님을 만난 덕분이다 .
그리고 책을 통해서 만난 또 한 사람 일본인으로 세계적인 미학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 덕분이다.
조자용 박사님은
30여년전 1970년대 후반에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 당시는 한적한 교외였던
화곡동에
<에밀레 박물관>을 가지고 계시다고 했다.
한국인 최초로 하버드대 에서 건축학 박사를 받으신 조박사님은
조선 건축의 심볼인 "귀면와(鬼面瓦)" 를 만나고
귀국한 후 우연히
이를 보자마자 여기에 빠져들어 도깨비문화와
조선 고미술에 심취하시게 되었다.
까치호랑이 그림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수집하여 수천 점의 "까치호랑이" 를 소장하고 계셨다.
조박사님은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로 독보적인 존재가 되셨고,
나중엔 겨레문화연구가,
삼신사 수련사 등을 운영하시는 등 한국 전통문화 연구 보급에 일생을 바치신 분이다.
구조공학자로도 활동하시며 미국 대사관저의 설계도 하셨고,
월드컵 붉은악마의 문양 디자인도 하시는 등 그 재능과 열정은
나중에 도깨비 박사로 까지 불리면서
다양하고 존경받는 일생을 보낸 분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유종열 ) 는
세계 3대 미학자의 한 사람으로 동경제대를 나온
미학평론에 관한 한 특히 동양미술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의 안목을 인정받은 분이다.
이분이 우리나라 고미술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찬탄과 놀라운 경이를 표했는데,
한국의 석굴암을 보고는 " 호흡을 빼앗겼다" 라고 경탄했고 ,
"고려자기의 곡선미는 곧 조선민족의 상징이다" 라고 찬탄과 동경을 표했다.
반가여래상, 고미술회화 등 한국문화의 연구에 평생을 바치었다.
"조선예술의 요소(要素)는 선(線)이다” 라고 하며 선은 조선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곱고 길게 건 조선의 선은 실로 심중을 연면히 허소하는 심정 그 자체다" 라고 갈파 하였다.
'민중의 원한도, 기망(祺望)도, 갈구도, 혈누(血漏)도, 모두 그 선을 따라서 흐르는 것 같다" .
"불상에서도,
도기에서도 - 눈물을 못 이기면서, 처량히 허소하는 애달픈 기쁨, 그 고적한 심중,
그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는 고민초조의 정을 미려하고도 , 개절 (알맞고 적절함)히,
그 유장(悠長)한 선에 포함케 한 것이다 " 라고 가슴을 울리듯 정곡을 찌르는 글을 남겼다.
실제로 이분이 소장한 한국고미술품의 질과 량은 경탄할만한 수준의 진품을 보여 주고 있었다 .
일제의 한국강점에 대해서는 통렬히 조선총독부를 비난하며 사죄하는 양식(良識)을 보였고,
"예술은 장구(長久)하고 승리하는것은 미(美)이지 칼날의 힘이 아니다"
라고
항변하였다.
또한 일제 총독부가 강제로 추진한 " 광화문철거"를 앞장서 반대한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후 시간만 나면 나는 조자용 박사님을 자주 찾아뵙고
인사동에서 빈대떡과 그 당시 밀가루 막걸리를 마시며 듣던 고미술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을 몰랐었다.
그때 구전으로 배운 토막지식들이 나를 감동시켜 열심히 민화를 모으게 되었다.
조박사님의
독특한 조선 민화에 대한 견해는 가슴깊이 내 가슴에 젖어 들었다.
민화에는 낙관(사인) 이 없다. 개인의 욕심의 혼적을 찾을 수가 없다.
창작에 대한 의욕은 강하지만, 보답에 대한 욕심은 없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사주는 사람도 없는 , 민중-상놈들의 애환을 같이 해주는 무념무상의 그림이었다.
여기에는 동양화에서 흔히 말하는 독화니, 화중시니, 운치니, 기운생동이니, 공간개념이니
또는 서양화에서 말하는 원근법이니, 명암이니, 색채니, 구도니, 구성이니 이런 것이 없다.
아니 전혀 무시해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민중의 애환과 바램과 일상을 그려주었다.
한국미술품은 이미 세계 고미술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고 있었다.
한국고미술이
그 우수성과 뛰어남으로
이미 세계 고미술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과 그 상황을 듣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
우리나라 고미술 중 가장 최고의 작품은
첫째로 - 불화= 탱화 =사찰그림 -인데 이미 유태인수집가들이 거의 다 가져갔고.
둘째로 - 고려자기인데
이것은 일본 수집가들이 거의 다 가져갔고,
셋째로 - 이조자기나 회화인데 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이 거의 빼앗아 갔고,
남아있는
회화중 우수한 책거리 그림과 서책 등은 병인양요때 프랑스 군과
수집가들이 다 가져갔고,
그나마 남아 있는것 중 가장 훌륭한 것이 까치호랑이 민화 인데, 이것은 조박사님이 거의 수집하셨고,
마지막 남은 것은 그나마 민화와 보자기 작품 뿐이었다.
나는 이러한 명쾌하고도 날카로운 분석에 놀라고 감동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그당시 수집할 수 있는 대상으로선, 관심도 별로 못 받고, 초라하고,
낙관도 없는 싸구려 민화를 모으는 일이었다.
안타까웠던 것은 그나마 이것도 80년대 들어서며 얼마 안가서 사실상 공급이 끊어져
매매가 거의 사라지고, 모조품이나 일제때 만들어진 조악품들만이 간간히 거래되게 된 현실이었다 .
그당시 보자기 작품을 모으셨던 허동화 박사님은 그 수집품으로 지금 ‘한국 자수박물관’을 만드셨다.
그러면서 황석경을 통해
인사동과
청계천8가 시장을 매일이다 시피 오가며 골동 공부도 하고 수집도 하며
고미술에 심취해 계셨던 많은 훌륭한 분들과 어울리며, 교류하게 된 것은 일생의 행운이었다
그때 한기택박사님. 전 국립박물관장 정양모 박사님. 지금 자수박물관을 운영하시는 허동화 박사님.
골동의 큰손이셨던 신동진 사장님 등을 알게 되었고 ,
특히 우현(牛玄) 송영방 교수. 백계(白溪) 정탁영 교수. 이석(以石) 임송희 교수
- 당시 최고 인기의 동양화 3절- 와 하루가 멀다하고 교류하면서 고미술을 논하고,
천년 신라의 석물도 보고, 좋은 물건을 사면 안복(뽁)주도 마시고,
겨울엔 매화음도 하면서 ,
풍류를 즐기던 그 시절이 돌이켜 보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는지 새삼 짠하게 그리워진다.
정말 나는 행운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