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발해(3-3배한빛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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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발해
1.신라
2.발해
통일 신라의 정확한 명칭
• 통일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인 668년부터 후삼국 시대
직전의 신라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 통일이라는 표현은 틀렸다.. 삼국시대와 분류하기 위해 통일신라라
고 부르는 경우가 있지만 통일신라는 틀린 표현이다.
• 삼국 시대 이후의 신라라고 하여 ‘후신라’라고 한다.
• 신라 사상 가장 큰 영역을 지배 하였기에 ‘대신라’라고 하여 그 이전
의 신라와 구분하기도 한다.
후신라의 통일 준비
후 신라의 통일 준비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
신라는 진흥왕 때에는 활
나제 동맹을 맺은 신라와
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
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
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
면서 삼국 간의 전쟁을
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
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하였다(551년).
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
합을 도모하였다.
나당연합
백제의 공격
• 의자왕은 642(2년)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서 신라의 성40여 개를 점령하였
다.
신라의 위기
• 백제에게 40여 개의 성을 빼앗긴 신라는 급히 고구려에 동맹을 요청해 보지만
거절당한다.
당나라와의 동맹
• 백제가 열 받게 계속 공격하자 빡 친 신라는 당나라에게 고구려 대동강 이북
의 땅을 주는 조건으로 나당 연합군을 완성시켜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했다
최후의 백제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의 성 40여
신라의 김유신이 군사 5만을 이끌
개를 정복한 후 왕권을 강화하는 도
고 황산벌에서 백제 군대와 전투를
당시 백제의 군사력은 분산되어 있
중 귀족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벌였다. 이 당시 백제의 계백은
었고 이미 방어할 힘이 없었던 백제
그 때 나당연합의 백제 공격이 시작
5000의 군대를 이끌고 존나 잘 싸
는 그대로 멸망하고 말았다.
됐다.
웠지만 패하고 말았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강력했지만
지도층의 분열과 백강구전투의
패배로 실패하였다.
최후의 고구려
이때를 노려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고 신라군도 이
에 호응하여 남쪽에서 공격하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니 고구려는 1년간 항쟁을 계
항전을 했지만 연개소
속하다가 668년에 멸망하고 말
문이 죽은 후에는 그의
았다.
동생 및 아들들 간의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
의 태종무열왕은 당나
권력 쟁탈전으로 국세
가 급격히 쇠락하였다.
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부흥운동은 지도층의 분열로 실패하여 남은자 들은 발해의
주민이나 신라로 들어갔다.
나당전쟁
당나라가 신라
신라가 열 받아
를 통제 하려
서 선제공격 한
함
것을 시작으로
싸움
매소성 전투에
서 큰 승리를
거두어 전쟁의
주도권 장악
신라의 승리로 당나라는 물러가고 신라는 영토를 확장했다.
통일신라의 발전
김춘추는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었다.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은 통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을 위해 전제 왕권을 강화하고 제도를 정비해 통일신라의 제도를 다져 놓았다
삼국통일을
시작한
태종무열왕
통일전쟁을
승리로
만든 문무왕
삼국
통일
신라의 정치제도
국왕의 직속기구인 집사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왕권강화
귀족 회의 기구인 화백회의 의 기능은 축소되었다.
신라의 정책
전국을 9주로 나누어
그 밑에 군과 현을 두어 중앙에
서 파견된 관리가 다스렸다.
반란을 막기 위해….
옛 백제인과 고구려인의 지배층
침략을 막기 위해..
중 일부에게 관직을 내렸다.
수도와 왕궁을 담당하는 중앙군
( 옛 고구려인과 옛 백제인을 위 에 9서당을 편성하였다
착세력인 촌주가 다스리게 했다.
한 정책을 펼침)
(이 9서당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전국 주요지역에 특별 행정 구
유민도 포합되었다.)
역인 5 소경을 두었다.
가장 작은 지역 단위인 촌은 토
각 9주에 한 개씩 위험지역인
한주에 2개의 정을 설치하여 총
10정의 지방군을 배치하였다.
통일신라의 토지개혁
신라 제도의 개혁은 귀족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약
화하고 국가의 재정을 늘리는 방향으로 이루어짐.
녹읍을 폐지하고 대신에 해마다 세조를 차등 있게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일반 백성들에게 정전을 주었다.
국가의 수입 증가!!
통일 신라의 활발한 대외 교류
신라의 삼국 통
일로 인한 동아
시아의 국제 질
서 안정
8세기에 신라
는 다시 당과
교류하기 시작
하였다.
상업의 발달,경
제력의 향상,항
해술의 발전
외국과
활발한 교역
활동을 하였다.
신라는 금은 세공품
과 인삼 등을 당에 수
출하였고 비단 서적
문구류 등을 수입하
였다.
교류가 활발해지자 당나라에 생긴 신라!
신라관
신라방
당과 교류가 활발해져 당에 생긴…
신라관 : 신라인들의 숙박시설
신라방 : 신라인들의 거주지
신라원 : 신라인들이 지은 절
신라소 : 신라인들을 감독하는 관
청
신라원
신라소
일본과의 교류
금속제품
생활용품,불경
직물원료
신라는 일본과의 교류로 직물원료를
수입하였고 일본은 금속제품,생활용품,
불경 등을 수입했어
신라인들이 당에 진출하다
새로운 지식,벼슬을 얻기 위해 당으로 건너간 학자들
김운경,최치원,김가기,최승우…..
당으로 건너간 승려(의상,혜초)
의상은 화엄종의 교리를 배우고 왔고..
혜초는 불교를 배우고 인도~서역 지역까지 순례하여 “왕오천축국전”을 썼다
장보고
당에서 활약하고 돌아와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군사 및 무역 기지로 삼아 해상무역을 장악함.
통일신라의 문화
유교는 왕과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기
때문에 국가는 유교 진흥 정책을 펼쳤다.
유교진흥정책을 통해 선출된 뛰어난 유학
자들은 관직에 올라 왕을 도와 왕권강화
에 기여하기도 했다.
국학을 정비하여 유학교육을 발전시켰다.
후에는 유교 경전을 많이 익힌 사람을 관
리로 선발하는 독서삼품과를 실시했다.
유학 교육의 확대
불교사상
당에서 많은 승려
전쟁의 상처를 씻
들이 불교 경전과
어낼 정신적 치유
함께 들어와 불교
책이 필요함
에 대한 이해도가
민족을 통합 할 수
높아짐
있는 신앙이 요구
원효의 여러 불교
경전의 교리들을
하나의 진리로 종
합하는 사상
불교의 발전
과 대중화에
큰 도움
의상의 화엄종의
교리와 관음 신앙
불교의
대중화
예술의 발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은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
쇄물로 알려져 있다..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선덕 대왕 신종
석굴암
신라의 삼국통일은 삼국의 문화 역시 통일하고 발전시켰다 특히 불교가 대
중화 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자 건축과 조각이 많이 만들어 졌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
성골의 폐쇄적인 성향 때문에 왕위계
승자가 없고 진골의 수가 늘어나자 골
품제의 문제점이 나타났다.
당연히 성골이 없으니 중앙 진골
귀족들끼리 왕위 쟁탈전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3~1두품
전국적으로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자
여기저기서 부정 부패한 관리들이 나
타나기 시작했다.그러자 전국에서 관
리들의 수탈과 비참한 생활에 불만을
품고 전국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상주에서는 원중과 애노가, 원주에서
양길, 안성에서 기원 원산주에서 견훤
등이 반란을 일으키며 세력을 키웠다.
이때 최지원이 개혁안을 건의했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신라 왕실
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호족의 성장
신라 왕실이 지방의 통제권을 잃으면서 지방
에서는 호족이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호족 중에는 오랫동안 세력을 키운 촌주
중앙 권력 다툼에서 밀려 몰락한 귀족
무역으로 성공한 해상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성을 쌓고 농민들에게 세금을 거뒀으
며 지방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
골품제의 한계나 신분 때문에 6두 품에 머물
렀던 사람들은 신라를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새로운 사상의 유행 과 후삼국시대
신라 말에는 선종과 풍수지리설 유교사상이 복합적으로 유행하였다.
선종과 교종이 있었는데..
호족이 성장하자 선종도 같이
성장하여 후에는 선종이 전국적
으로 퍼져나갔다.
풍수지리설
승려 도선은 신라의 도읍인 금
성만 중심으로 삼는 것에 반대
하여 호족들의 지지를 얻었다.
견훤과 궁예의 다구리
그렇게 호족에게 당하던 신라는
견훤,궁예한테 다구리 당해서
이처럼 새로운 사상이 유행하면 영토가 줄어들었다.
서 호족들에게 새로운 사회를
901년 후삼국시대 시작
건설하는데 사상적 기반을 제공
해 주었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을 분열 시키기 위해 당 곳곳에
강제 이주를 시킴
요서 지방에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때를 틈타 고구려
출신 대조영이 여러 집단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함.
쫓아오는 당의 군대를 물리치고 만주의 동모산에 자리를 잡았다.
대조영은 성을 쌓고 발해를 건국했다(698년)
남쪽에는 통일신라가 북쪽에는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 시대가 성
립하였다.
발해
당나라
‘황제’
칭호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고구
려의 옛 땅을 회복해 나갔다.
해동성국을 이루다.
당과 발해가 동일한
위치에
있음. 성장에 위기를 느끼자 무왕이
당이 발해의
장문휴를 보내 당을 먼저 공격 함
한편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은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신라와 교류하였다.
문왕은 수도를 상경으로 옮기고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국가 발전
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발해는 9세기 초 선왕 시대에 전
성기를 맞이했다
이때 중국은 발해를 ‘해동성국’
이라고 불렀다.
서쪽으로 요동지방
남쪽으로 대동강 이북과 함경도 대부분
북쪽으로 만주 일부와 연해주에 이르는
최대의 영토를 다스림
통치 체제
중앙 집권적 통치를 하였고
3성 6부를 중심으로 조직하였다.
3성은 최고 합의 기구인 정당성을 중심으로
운영함(이곳에서 중요한 일을 결정)
중대성
왕
정당성
선조성
구체적인 업무는 6부에서 나누어 맡아 처
리함 (6부의 명칭은 유교에서 강조하는 덕
목으로 사용)
중정대 : 관리 비리 감찰
문적원 : 서적과 외교 문서 담당
주자감 : 최고 교육 기관
발해의 영토 분배와 군사 조직
요충지에 5경을 전국을 15주(도)
로 그 밑에(시)62주로 나누었다.
중앙에서 지방관은 파견하여 다
스리도록 함..
가장 작은 구역 단위인 촌락은
토착 세력이 다스리도록 함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김.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
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은 발해
고구려와 발해의 관계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국가이기 때문에 고구려 계승의식을
내세웠다.
•발해는 고구려를 뜻하는 ‘고려’를 국호라 사용한적이 있다.
•문왕은 자신을 고구려 왕이라고 표현했으며 일본에서도 이를 인정했다.
•발해의 주민은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고구려의 성씨를 가진
사람이 많다.
독자적 문화를 완성하다
고구려의 양식을 따른 문화들
• 발해의 집터 유적에서 고구려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모양의 온돌이 발견된다.
• 정혜 공주의 무덤은 고구려의 방식의 모줄임천장 구조를 이루고 있다
말갈과 당의 양식을 따른 문화들
• 발해의 수도 상경의 구조를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계획적으로 조성함.
• 정효 공주 무덤과 영광탑의 건축 기법&양식에서 당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 일반 주민들의 흙구덩이무덤은 말갈의 문화에 따른 것이다.
발해의 뛰어난 불교문화
• 절터에서 발견된 불상, 석등, 연꽃무늬 막새 등에서도 발해의 수준 높은 건축 및 조각 기술
을 볼 수 있다.
발해의 교류
수도 상경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들과 활발
하게 교류할 수 있었다.
당과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당의 산둥반도에
는 발해인의 숙소인 발해관이 설치되었다.
발해와 신라는 교류가 적었으나 신라도를
통해 교류가 활발해졌다.
신라와 발해는 외국에서도 학문을 두고 서
로 경쟁했다.
발해의 멸망
발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거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의 침입으로 3일만에 멸망했다는
얘기가 있다.
발해는 그리고 698년에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어 926
년 거란의 의해 멸망되었다
이 과정 중 발해 유민이 고려로 내려오면서 고려가 힘
이 더 세지게 되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고도 할 수 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