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향토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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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平學 강좌
양평의 歷史와 文化
講師 李 胤 在(이윤재) ☏ 010-5156-7017
▲ 양평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역사연구분과장
▲ 양평역사문화연구회 지도교수
歷史란 무엇인가?
 에드워드 핼릿 카[ Edward Hallett Carr 1892 ~ 1982]
영국의 외교가, 정치학자, 역사교수
 역사란 무엇인가?(1961년 , 원제What is history?) 의 저자
 역사란 “현재를 거울삼아 과거를 통찰하고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며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하는 수단”이다.
 역사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을 찾고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현재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역사관 → 영웅사관, 민중사관 / 식민사관, 민족사관,
역사와 문화콘텐츠
( history and Culture Contents)
④떠드렁산 이괄 부친의 묘 설화 / 윤극영 반달공원
③양평의 최초 학교 건물 관문골(오영석씨 가옥)
②황순원의 소나기마을
①춘향전과 남원
우리나라의 대표적 역사기록
 正史 - 삼국사기 ,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 野史 - 삼국유사, 제왕운기(이승휴), 동국이상국집(이규보), 용재총화(성현), 지
봉유설(이수광), 성호사설(이익)
 文集ㆍ日記類 - 목은집, 익재집(역용패설이제현), 삼봉집, 포은집, 열하
일기, 하재일기
 碑文 – 광개토대왕 비문, 백두산정계비, 진흥왕순수비, 신도비
 族譜 –청구씨보 靑丘氏譜≫·≪잠영보 簪纓譜≫·≪만성대동보 萬姓大
同譜≫·≪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 등이 있다. ≪조선씨족통보≫
는 ≪동국문헌비고≫의 <성씨록 姓氏錄>
 15세기에 간행된 족보는 문화 류씨 영락보(1423년), 안동권씨 성화보
(1476년) 남양 홍씨(南陽洪氏, 1454), 전의 이씨(全義李氏, 1476), 여흥 민
씨(驪興閔氏), 1478), 양성이씨(陽城李氏 계묘보(1483년) 창녕 성씨(昌寧
成氏, 1493)등이 있다.
양근 지평의 역사(지명변경)
 (1) 양근군(楊根郡)

고구려 시대 : 항양(恒楊), 양근(楊根)

신라 시대 : 경덕왕 때 빈양(濱陽)으로 개칭

고려 태조 때 양근으로 옛지명 회복

고려 고종 때(1257년) 영화(永化)로 개칭

고려 원종 때(1269년) 익화현(益和縣)으로 개칭

고려 공민왕 때(1356년) 군으로 승격되면서 양근군(楊根郡) 으로 개칭

고려 공민왕 때 미원(迷原)고을을 현으로 승격하고 감무를 두었다가 얼마 뒤
다시 양근군의 속현으로 함
⊙ 옛지명 사용 업소 : 항양빌딩 / 영화법률학교 / 영화세탁소 /영화상회
 (2) 지평현(砥平縣)

고구려 시대 : 지현현(砥峴懸)

신라 시대 : 지평(砥平)

조선 시대(고종) : 지평군(砥平郡,1895년)
양평군 연혁
 (3) 양평군(楊平郡)
 1747년(영조23년) 양근현청 건지산 밑에 있다가 갈산 관문골로 옮김
 1908년 9월 양근군(楊根郡)과 지평군(砥平郡)을 합병하여
양평군(楊平郡)으로 칭함
 1914년 3월 본군 관할 남종면(南終面)이 광주군(廣州郡)으로 이속
 1921년 5월 8일 양평군청, 관문골에서 현 위치로 이전
 1942년 4월 본군 관할 설악면(雪岳面)이 가평군(加平郡)으로 이속
 1963년 1월 여주군(驪州郡) 관할 개군면(介軍面)이 본군으로 편입
 1973년 7월 서종면(西宗面) 삼회리(三會里)와 노문리(盧門里) 일부가
 가평군(加平郡)으로 이속
 1979년 5월 양평면(楊平面)이 양평읍(楊平邑)으로 승격 , 이전
 2006년 12월 1일 지제면(砥堤面)이 지평면(砥平面)으로 개칭
100년전의 땅이름
– 1911년 발행> 양평군편

읍내면 – 양근리, 공흥리, 백안리, 덕평리, 신애리, 오빈리 일대

동종면 – 창대리, 회현리, 도곡리, 대흥리, 봉성리, 원덕리 일대

남시면(南始面) – 강상면 전체

남중면(南中面) – 강하면 전체

남종면(南終面) – 광주시 남종면

서시면(西始面) – 양서면 복포리 국수리 신원리 대심리 일대

서중면(西中面) – 양서면 용담리 목왕리 양수리 부용리 일대

서종면(西終面) – 서종면 전체

고읍면(古邑面) – 옥천면 전체

북상도면(北上道面) – 가평군 설악면 가일리 방일리 엄소리 일대

북하도면(北下道面) – 가평군 설악면 신천리 창의리 사룡리 일대

군내면(郡內面) – 지평면 지평리, 월산리, 송현리 일대

남면(南面) – 지평면 수곡리, 곡수리, 대평리, 옥현리 일대

상서면(上西面 – 용문면 화전리, 삼성리, 다문리, 연수리 일대

하서면(下西面) – 용문면 금곡리, 광탄리, 망릉리, 중원리, 조현리, 덕촌리, 오촌리, 신점리 일대

상동면(上東面) – 양동면 전체

하동면(上東面) – 지평면 일신리, 망미리 일대

상북면(上北面) – 청운면 다대리 용두리 비룡리 가현리 여물리 삼성리 신론리 갈운리 일대

하북면(下北面) – 단월면 덕수리 백동리 삼가리 봉상리 보룡리 향소리 부안리 석산리 산음리 일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현재 지명으로 정착됨
<朝鮮地誌資料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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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시장, 나루터, 포구
읍내면 <읍내장> 동부리 서부리(현 양근리)
남면 <곡수장> 현 지평면 곡수
상북면 <용두장> 현 청운면 용두리
남종면 <우천장> 남종면 우천리
북하도면 <미원장> 현 설악면 신천리
津(나루터) - 강이나 내, 또는 좁은 바닷목에서 배가 건너다니는 일정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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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면 <갈산나루> 읍내면 동부리(현 양근1,2리)
<덕구실나루> 현 오빈리
동종면 <나루께> 동종면 백곡리(현 회현2리)
남시면 <서라우나루> 남시면 교암리(교평리)
<시직골나루> 남시면 연양리(화양리)
<진변나루> 남시면 진변리(현 교평리)
남종면 <소내나루> 남종면 우천리
<청탄나루> 남종면 대수청리
서시면 <상심이나루> 서시면 상심리
<한여울나루> 서시면 대탄리
<허리원나루> 서시면 신원리
서중면 <용진나루> 서중면 용담리
<두물머리나루> 서중면 양수리
서종면 <문어미나루> 서종면 문호리
<무두리나루> 서종면 수입리
<사기막나루> 서종면
고읍면 <달으락나루> 고읍면 기곡리(현 옥천 아신리)
북하도면 <자잠나루> 현 가평군 설악면
포구 - 배가 드나드는 강이나 바다의 어귀(포구에는 창고가 있고, 시장이 서는 경우가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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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종면 바네포구(盤過浦) 동종면 진변리(현 회현2리)
남종면 소네포구(우천포구) 남종면 우천리
양평의 역사적 인물(1)
개국공신
⇒ 고려 개국공신 : 함규(왕규)
⇒ 조선 개국공신 : 김인찬, 김사형, 류 관
대마도 원정(정벌)
⇒ 김사형(1397년 12월 태조 5년) 문하우정승, 5도병마처치사
⇒ 이순몽(1419년 세종원년) 우군절제사
정승(시중, 정승,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 김사형, 류관, 정창손, 강맹경, 이준경, 이덕형, 이단하, 류상운, 류봉휘
성리학자(주자학)
⇒ 권경우, 조욱, 이식, 이우신, 이항로
양명학자
⇒ 남언경(지평현감), 이경호(지평현감), 권철신(천주교 성인)
실학 및 서학
⇒ 류득공, 권철신, 권일신
의병활동 및 독립운동 ⇒ 多數
양평의 역사적 인물(2)
 (1) 자옥(730년 신라 38대 원성왕, 소수(小守) . 당나라 유학생 출신)
 (2) 함혁(양근함씨시조, 양근자사), 함규(고려 통합삼한익찬 개국공신)
 (3) 보우대사(1301년~1382년, 공민왕 왕사, 太古宗 宗祖) 圓融思想
 (4) 조욱 (1498~1557 호 용문, 조광조 문인, 詩文, 書畵에 능함. 이제신의 스승
 (5) 남언경(1528~1598)지평현감, 양명학자, 양근에 낙향하여 의병활동
 (6) 이식(1584 ~ 1647, 호 택당(澤堂), 교육자, 4대문장가, 홍길동)
 (7) 권철신(1736-1801, 정조, 정약전, 정약용, 이존창, 유항검 스승, 양명학)
 (8) 유득공(1749~? 양근군수, 북학파, 발해고, 경도잡지)
 (9) 이항로(1792∼1868. 理氣二元論, 衛正斥邪) 불유사승(不由師承)
 (10) 양헌수(1816 ~ 1888) 제주목사, 병인양요 승리, 화서선생 제자
 (11) 이중하(1846년~1917년, 土門勘界使, 간도 영토지킴이, 외교가)
 (12) 여운형(1886~1947, 신한청년당, 조선체육회장, 건준, 정치외교)
함왕성터(옥천면 용천리)
몽양 여운형
원성왕릉과 문무석
이식 선생은 택풍당(澤風堂)에서 자손과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조선
말기까지 택풍당을 거쳐간 그의 휘하에서는 정승 3명, 판서급 10명,
문과급제 22명, 무과급제 17명, 생원ㆍ진사 69명 등 모두 121명이 출
사했다.
호 : 태고(太古), 보허(普虛) 시호 : 원증(圓證) 이칭 : 보월승공(寶月昇空)
고려 말기의 승려로 우리나라 임제종(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
(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臨濟) 의현(義玄)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
의 시조이다. 속성은 홍씨.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檜巖寺)광지(廣智)의 제자가 되
었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행하였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참구하
였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한 뒤, 선(禪) 수행에 몰두하였다.
<태고집(太古集)>에 그의 법어와 시 등이 수록되어 있어, 그의 불교에 대한 깊이와
경지가 잘 나타나 있다. 양근(楊根)의 초당에서 어버이를 봉양하며 1,700칙(則) 공안
을 점검하였고, 1339년 소요산 백운암(白雲庵)에서 「백운가」를 지었다. 1341년(충혜
왕 복위 2)중흥사(重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
을 창건하여 5년 동안 머물 때 「태고암가」 1편을 지었다.
양근 출신으로 사나사, 소설암, 상원사 등과 관련 있다. 그의 탑비는 정도전이 지었다.
太古普愚의 圓融思想
태고보우는 敎와 禪을 일치시켰고, 淨土와 禪을 하나로 융합시켰다. 이 태고보우의 원융사상
은 원효의 회통불교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며, 이 원융사상은 오늘날 한국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며 태고종의 종풍이기도하다.
보우는 비록 출가하였으나 부모님께 효도하였고, 속세에서 나라를 위해 國師로써 중책을 맡
았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이는 보우가 출세간인 佛僧이면서도 세간
을 버리지 않았고 또 세간에 출입하면서도 출세간에 철저했던 것이니 이는 원효의 無碍사상
과 그 맥을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태고보우의 원융사상은 元曉의 和諍思想(화쟁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敎와 禪, 生死와 涅槃
(열반), 世間과 出世間 등의 모든 현상적 대립을 극복한 通佛敎적인 사상이다.
그는 공민왕의 王師로서 그 당시 불교계가 사분오열 되어 백인백색의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九山禪門을 통합하고, 선교의 일치를 주장하는 등 그의 원융불교 사상을 실천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 원융사상은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인 통불교의 개념으로 맥을 이었다. 이 원융사상
은 오늘날 불교 뿐 만 아니라 분열된 정치, 사회, 문화, 종교, 교육 등 사회 제 분야의 극심한 분
열과 혼란을 극복할 가장 유력한 지도이념이라 할 수 있다.
五敎 九山
5교는 교학(敎學)을 바탕으로 한 교종의 5종파이다.
열반종(涅槃宗) 보덕(普德) 경복사
계율종(戒律宗) 자장(慈藏) 통도사
법성종(法性宗) 원효(元曉) 분황사
화엄종(華嚴宗) 의상(義湘) 부석사
법상종(法相宗) 진표(眞表) 금산사
9산은 선종(禪宗)에 속하는 9개의 사찰이다.
실상산문(實相山門), 홍척(洪陟) 실상사
가지산문(迦智山門), 도의(道儀) 보림사(寶林寺)
동리산문(桐裡山門), 혜철(惠哲) 태안사(泰安寺
사자산문(獅子山門), 절중(折中) 흥녕사(興寧寺)
사굴산문(闍崛山門), 범일(梵日)굴산사
희양산문(曦陽山門), 긍양(兢讓)봉암사(鳳巖寺)
봉림산문(鳳林山門), 심희(審希) 봉림사(鳳林寺)
성주산문(聖住山門), 무염(無染) 성주사(聖住寺)
수미산문(須彌山門) 이엄(利嚴)광조사(廣照寺)
불교의 깨우침
⇒ 돈오점수(頓悟漸修) :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 단계가 따름을 이르는 말
☞ 돈오(頓悟) : 禪宗 소승에서 대승에 이르는 얕고 깊은 차례를 거치지 아니하고, 처음
부터 바로 대승의 깊고 묘한 교리를 듣고 단번에 깨달음.
☞ 점수(漸修) : 敎宗 차례, 위계(位階)를 거쳐 점차(漸次)로 수행하고 도를 얻는 것을
말하는데 마음을 닦는 일의 기본은 문득 깨닫는 돈오(頓悟)와 오래 두고 닦는 점수라
고 한다
그리스의 철학(사물의 관점)
사물의 속성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속성에 근거해 범주화 하며
그 범주들을 사용해 어떤 규칙을 만들어
사물들의 움직임을 그 규칙으로 설명함
동 서양의 차이점
西洋 : 사물의 본질을 중시 / 독립성 / 논쟁 /부분을 본다 / 세상을 통제하려 함 / 직선
론 / 논리 중시
東洋 : 사물의 관계를 중시 / 상호 의존성 / 타협 / 전체를 본다 / 세상에 적응하려 함 /
순환론 / 경험중시
성리학(性理學)
성리학 : 爲己之學(修養 修己를 위한 학문)
주희가 북송에서 일어 난 신경향의 학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이것을 절충하고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것(대학, 중용, 논어, 맹자)
이기론(理氣論) : 理=太極=道(형이상적)와 氣=陰陽五行(형이하적)은 形而下의 음
양2기의 교감에 의해 생성되는 개체와 相卽不離인 것이다.
도덕론(道德論) : 사람은 자기의 본연의 성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덕을 완
성하는 것이며 개별적 인간은 실천에 의해서만 일반자로서의 道-理-性을 구현할 수
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수양론(修養論) : 사물 하나 하나에 리를 궁구한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나를
궁구하는 것이며 나를 대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物의 理와 心의 理와의 통일적인 파
악에는 다소 불충분한 점이 있어 훗날 양명학이 발생했다 .
주자사상이 宋代 이후 끼친 영향은 지극히 크다. 오늘 날 주자의 사상이 봉건사회
에 있어서 지배계급의 상하적 신분의 확립을 지향하는 논리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그 학식 논리 구성, 학문적 태도는 의연히 중국사상 내지 동양사상의 해명에 있어 중
요한 지위를 점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양명학(陽明學)
陽明學은 중국 명나라 철학자 왕수인의 호인 양명을 붙인 유가철학의 한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이다.
심즉리(心卽理)는 : 양명학의 윤리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性(태어날 때 생겨난 순수한 善性)
과 情(감정으로서 나타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대면시킨 마음 그 자체가 理와 다름이 없다고 하
는 사상이다.
치양지(致良知) : 양명학의 방법론적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치양지란 良知(善惡을 구분하는 것)
를 전면적으로 발휘하는 것을 의미하며 양지에 따르는 한 그 행동은 선이 되는 것으로 여겼다.
마음은 선악을 넘은 것이지만 뜻에서 선악이 생긴다. 그 선악을 아는 것이 양지이므로 선을 바
로 잡기 위해 양지를 배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지를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것이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주장과 양지를 가리고 있는 선악을 제거하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는 주장
으로 나뉜다.
지행합일(知行合一) :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말과 실천은 같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사상마련(事上磨鍊) : 수양처를 말하는 것으로 주자학에서는 독서와 거경궁리를 통해서 수양
을 한다고 하지만, 왕수인은 이런 의견에 반대해서 일상에서 양지를 닦아야 한다고 보았다.
격물(格物) : 주자는 격물을 사물에 임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卽物窮理라 하였으나 왕양
명은 格을 正으로 物을 事로 보아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해석했다.
한편 양명학은 사람의 욕구를 자연스런 것으로 생각해서 사람의 욕구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사람의 욕구를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욕구를 잘 다스리는데 목표를 두어야 한
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양평의 문화유적
☞. 사나사 923년 창건하고 공민왕 16년(1367년) 태고보우선사가 중건했다. 절 마당에는 고려식 3층
석탑(문화재 자료 21호)과 정도전이 지은 ‘미지산 사나사 원증국사탑비’(경기 유형문화재 73호), 함왕
각과 절 위쪽에 함왕성터(도 기념물 123호)가 있음
영조 51년(1773)에 양평군내 유지(有志)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堂山契)를 조직하고 향답(鄕沓)을 사찰
에 시주하여 불량답(佛糧沓)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 순종(純宗) 원년
(1907)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 용문사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 .경내에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
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있고,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수령 1,100년의 은행나
무 있음
☞. 양근향교 조선 중종 때 건립, 경기도지정문화재 자료 제19호,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설총. 최치
원. 정호. 주희. 안유. 정몽주. 김광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
시열. 송준길. 박세채 이상 25인 봉안
☞. 지평향교 조선 초기 건립, 경기도지정문화재 자료 제20호,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설총. 최치원.
정호. 주희. 안유. 정몽주. 김광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이상 25인 봉안
☞. 운계서원 1653년 건립, 1714년 용문서원 사액 받음 향토유적 제19호, 조욱(趙昱)과 조성(趙晟) 신변
(申抃)·조형생(趙亨生)·조문형(趙門衡)배향
☞. 수곡서원 지평유림이 1931년 창건. 의친왕이 헌액. 권경우 권경유 배향
☞. 벽계강당(노산사) 노산사는 6.25때 소실되어 1954년 유림이 새로 건립, 경기도지방기념물 제43
호, 주자, 송시열, 이항로 봉안
파사성 (婆娑城) 사적 제251호
신라의 제5대 파사왕(婆娑王, 80~112) 때에 축성하여 파사성(婆娑城)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고, 파사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파사산성에 관한 문헌적인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595년(선조 28)에 처음 보이고 있으며, 「대동
여지도(大東輿地圖)」에 파사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발 230.5m의 파사산에 위치하고 있고,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산
성으로 둘레는 약 1,800m, 높이 6.25m(낮은 곳은 1.4m)로 성벽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
다
1595년(선조(宣祖)28) 3월에 비변사(備邊司)의 요청으로 승(僧) 의엄(義嚴)을 도총섭
(都摠攝)으로 임명하여 수축(修築)하도록 하였는데 의엄(義嚴)은 성안에 집을 짓고,
성밖의 구릉과 평지는 둔전(屯田)을 마련하고 군사(軍士)의 양식(糧食)을 마련하였으
며, 무너진 성벽은 승인(僧人)을 동원하여 수축(修築)하여 1597년에 공사(工事)를 마
치었다.
파사성(婆娑城)과 용진(龍津) 사이에 부용성(芙蓉城)이 있는데 흙으로 쌓아서 망대
(望臺)로 삼으려 합니다. 사궁성(舍弓城)이 또 양근군(楊根郡)에 있는데, 서쪽 성이 매
우 험준하므로 사람들이 들어가 지키면서 피란의 계책을 세우려 합니다(1597년 선조
30년)
미지산 함왕성지
함공성(咸公城)또는 함왕성(咸王城)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성은
용문산 줄기의 해발 740m 지점,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험준한 곳
에 위치하여 고려 때에 축성(築城)되었다.
자연석으로 쌓은 성곽의 길이는 29,058척(약 8,805m)이라고 전해
지나, 현재는 700m 정도 남아있으며 성벽은 높이 1.6m 안팎이고
북·서쪽의 성곽이 잘 남아있는 편이다. 북동쪽에는 건물터로 보
이는 곳이 있으며 그 주변에 주춧돌로 보이는 큰 돌과 기와조각
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함왕성은 성을 쌓은 방법이나 성내에서 발견되는 유물로 보아
고려 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모든 지리지의 기록 내
용에 고려 때에 고을 사람들이 몽고의 군사를 이 성에서 피하였
다는 것으로 미루어 일시 난을 피할 수 있는 민보용(民堡用)의
산성으로 판단된다
부용산성(芙蓉山城)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위에 밝힌 대로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어에
사용되었는데 개군면 상자포리에 소재한 파사성(婆娑城)과 상응교신(相應交信)
하여 용진을 방어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래로 남한강 이북과 남북한강의 강물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일원이 한눈에 조
망되어 수로를 이용해 이동하는 적군을 감시할 수 있는 요새이다.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산의 평탄한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어 전체적인 형태는 동서를 장축으로 하는 타원형으로 작은 규모의 산성이다. 성 내부는 동․서로 양분
되는데 동쪽이 5m정도 높고 그 위에는 규모가 큰 고분이 한 기 있다.
고려 때 한 왕비가 시집간 첫날밤 방귀를 뀌어 이곳으로 귀양 보냈는데 왕비가
잉태하여 왕자를 낳았다. 유달리 총명한 왕자는 커서 도성으로 올라가 매일 돌아
다니며, “저녁에 심었다가 아침에 따 먹을 수 있는 오이씨를 사라”고 외치고 다녔
다. 차차 소문이 퍼져 급기야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임금이 소년을 불러 물
으니 그 소년은 “분명 이 오이씨는 저녁에 심었다가 아침에 따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은 밤사이에 아무도 방귀를 뀌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말하
였다. 왕은 그 아이가 자기 아들임을 알았고 왕비를 불렀으나 궁궐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살다가 죽었는데, 그 무덤이 산 정상에 있는 고분이라는 것이다.
양평지역의 근대교육사
1895년 2월 2일 고종황제가 교육강령에 대한 조령(詔令)에 “교육에는 그
방도가 있으니, 허명(虛名)과 실용(實用)의 분별을 먼저 세워야 할 것이다.
책을 읽고 글자를 익히어 고인(古人)의 찌꺼기만 주워 모으고 시대의 큰
형국에 어두운 자는 문장(文章)이 고금(古今)보다 뛰어나더라도 쓸모가
전혀 없는 서생(書生)이다. 이제 짐은 교육하는 강령(綱領)을 제시하여 허
명을 제거하고 실용을 높이겠다”고 하며 신교육 즉, 실학(實學)에 대한 필
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전인교육(全人敎育)적 관점인 덕양(德養), 체양(體養),
지양(智養) 등 세가지 강령을 지시했다.
4-H 정신(知ㆍ德ㆍ勞ㆍ體)과 일맥상통
근대 학교 설립현황(1891~1913)
 1891년 명진학교(외문호리) 설립하여 천주교신자 자제 20여명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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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자극받아 곧바로 문호리에 문상학교 개설 - 성낙원, 조동윤,
이병익, 백홍기
- 1899년 4월 1일 서중면(양수리 일대) 영화법률학교 설립 정윤철, 김형선, 김유장, 교사(한응이, 류태영)
- 1902년 양근공립소학교 - 부교원 임명 / 1906년 공립양근보통학교로
개명. 1909년 공립양평보통학교로 개명 / 1910년 양평군수 정원모 교장
겸임 1911년 설치인가 재개교 / 1923년 현 양평초등학교 위치로 이전
- 1907년 사립 광동학교(서시면 신원리) 여운형, 황봉연
합
- 1907년 사립 용문학교(양평 양근리) 군주사 이은철
병
- 1908년 사립 진용학교(서중면) 이은철, 정원모, 성락윤, 이규하
- 1908년 사립 계명학교(지평군)김효병, 이건영(군주사) 권중익, 한익교
- 1910년 사립 수성학교(지평 곡수리) 나운보, 신태위
- 1913년 광명의숙(용문 광탄리 남원양씨 문중) / 1915년 지평사립학교 /
1916년 공립지평보통학교(현 용문초등학교)
근대 학교 설립현황(1921~1945
 - 1921년 사립 광명학교(개군면) 오순근, 최인옥, 김익진, 김인식, 박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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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승 교사(오필희, 조규선)
- 1921년 2월 청운공립보통학교(청운 용두리)설립, 1924년 4월 개교
- 1926년 양서공립보통학교(양서면 도곡리) 설립, 1927년 4월 개교
- 1927년 정배사숙(서종면 정배리) 설립 운영해오다 1935년 개교,
안재승 선생
- 1930년 대아의숙 설립(청계리 한윤헌) 1948년 대아초등학교 개교
- 1931년 양동공립보통학교(양동면 석곡리) 설립
- 1931년 지제공립보통학교
- 1932년 옥천공립보통학교
- 1934년 덕수간이학교(광탄공립보통학교 부설) /
1936년 단월공립보통학교
- 1935년 강상공립보통학교(강상면 신화리) 개교
- 1946년 양수분교장 / 1949년 양수초등학교 개교
- 1945년 원덕분교장 / 1949년 원덕초등학교 개교
상급학교 설립현황
 - 1913년 양평공립간이농업학교(양평보통학교 부설)
1921년 폐지
 - 1928년 양평농잠실수학교(양평보통학교 부설) 해방 전
까지 운영
 - 1947년 양평초급중학교
(양평중학교) 설립 개교
 - 1949년 서종고등공민학교
(서종중학교) 설립 개교
 - 1953년 5월 19일
양평고등학교 3학급 설립
노동야학 설립현황
 - 1922년 신애노동야학(양평 신애리) 설립
 - 1922년 연수학당(용문 연수리) 서상규, 서병돈, 박영인, 홍성운
 - 1923년 성호학당(용문 삼성리) 권씨문중
 - 1924년 성덕학당(강하면 성덕리) 서재철, 윤증호
 - 1924년 광탄노동야학(용문 광탄리 3년과정) 설립 / 양재은
 - 1927년 청운노동야학(청운 다대리)박효원
 - 1928년 갈산노동야학(양근리) 최석준, 김보형, 김백원
1908년 11월 14일자 황성신문 1면 6단에
게제된 기사(일부)
「1908년 11월 4일 양평군 관내 12학교가 연합운동회를 개최하였는데 참가학
생이 430여명이다. 운동과목은 릴레이, 2인 삼각경기, 높이뛰기, 넓이뛰기
등이였는데 우승자는 여운홍을 비롯한 28명이다. 이날 행사에서 정원모 군
수가 3원 상당의 교과서를 최우수 2명에게 시상하고, 군주사 이은철씨는
‘양평군각학교연합대운동기념’ 이라고 새긴 공책을 일반 학도들에게 나누
어 주었다. 또한 교사 강동운씨가 종이권련 3상자, 일본인 우체국장이 공책
10권, 군주사 안익수씨가 공책 4권과 연필 2타스를 기부하였다. 오후 4시에
각학도가 합동으로 체조를 1시간가량 한 후, 운동가를 제창하고, 군청에 모
여 만세삼창을 외치니 군중들이 구름같이 모여 사상 초유의 훌륭하고 장
한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1910년 5월 7일자 황성신문 기사
 「순종황제가 동적전(東籍田)에서 친히 농사일에 시범
을 보일 때 ‘양평군지방위원 이근하, 이종덕씨가 정원
모 군수의 위임을 받아 군내 공립학교 학원 4명과 사립
학교 학원 4명을 인솔하여 동적전에 참여했다」
 동적전은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인 전근대국가에서 농사를
권장할 정책적인 필요에 의해 농사를
주관하는 신인 신농씨(神農氏)에게
제사지내고 국왕이 백성에게 농사
시범을 보이기 위해 두었던 국가
행사였다.
1926년 10월 10일 동아일보
(1926년 현재 14,216호에 인구 74,056명)
양평의 옛 모습들
제4회 세계보건기념 예방주사(1955년)
양평군청(1970년)
양평복지관(현 양평극장
1970년대)
60~70년대 양평의 이모저모
양평읍 양근1리
삼거리(현재 회
전로타리)
양평복지관에서 제2회 미쓰양평선발대
회가 열렸는데 모두 7명의 美人이 선발
되었다. 그 가운데 眞ㆍ善ㆍ美 3명을 뽑
아 양평군수가 직접 시상하였다.
1971년 장마
양평시내가
모두 물에 잠
겼다.
양평역사문화연구회
http://cafe.daum.net/macgeoll
【목적】
본 연구회는 지역 역사문화를 이해하고 연구 계승 발전시키며 회원 상호간의 상부상조
를 돈독히 함을 목적으로 한다.
【사업】
1. 지역 고유문화의 개발, 보급, 보존, 전승 및 선양
2. 향토사의 발굴, 조사를 통한 콘텐츠 개발
3. 지역 문화 행사 참여 및 회원 간 친목도모
4. 문화에 관한 자료의 수집 및 지역탐방
5. 지역 전통 문화의 국내 외 교류
6. 지역 문화에 관한 다각적인 접근을 통한 교육 활동
7.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한 문화 활동과 연구서적과 간행물 발간
8. 회원 상호간 활동을 위한 사이버 공간 활성화
9. 기타 지역 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업
2015년 현재 52명이 3개 팀으로 나누어 활동하고 있음
1. 몽양 여운형팀
2. 화서 이항로팀
3. 태고 보우대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