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지도 A History of The World in 12 Maps 제리 브로턴 원다성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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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지도
A History of The World in 12 Maps
제리 브로턴
원다성
9. 국가 - 프랑스
1793년 1월 5일, 공화국 프랑스의 국민공회는 ‘프랑스 혁명력 수립형’
을 발표했다.
국민공회 대의원인 데글랑틴과 사무국 국장 에티엔 니콜라 칼롱은
“아카데미 지도라 불린 프랑스 일반도”를 압수하고 장도미니크 카시
니를 무릎 꿇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지도는 지구 표면을 측량하는 측지학과 삼각측량으로 프랑스 전국
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측량해 만든 지도였다. 예정대로 완성했다면
1:86,400 축적으로 제작된 지도 182장을 이어 붙여 가로 11m, 세로
12m의 프랑스 전국지도가 되었을 것이다. 카시니는 이 기획을 실행하
면서 현실적, 재정적, 정치적 우여곡절도 있었고 각 세대가 추구하는
방향도 달랐지만, 측지학에 삼각측량을 결합한 이들의 방식은 그 후
서양의 모든 지도 제작에 영향을 미친다.
이 지도의 군사적 가치는 누구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막
탄생한 프랑스 공화국이 적대적인 이웃 왕국들의 침략에 직면했을 때
프랑스의 각 지역과 경계를 상세히 묘사한 카시니 지도는 새로운 정
권을 방어하는 데 필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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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국 가
1666년 12월, 젊은 국왕 루이 14세는 재정감독관 장바티스트 콜베르
의 종용으로 과학아카데미를 구성했다. 콜베르는 아카데미의 영역을
천문학 너머로 확장하고, 이곳을 과거의 알렉산드리아나 팔레르모 또
는 세비야의 무역의 집 같은 곳과는 사뭇 다른 과학 지식의 집합소로
만들려는 야심이 있었다.
콜베르는 아카데미에 대규모 영토를 측량할 새 방법을 개발하라고 요
구했다. 카시니는 경도를 가장 정확히 계산하는 천문 관측법을 제시했
고, 프랑스 사제이면서 천문학자인 장 피카르는 현실적인 측량술을 기
초로 지형의 정밀함을 더했다. 피카르는 계측기를 이용해 천체 현상을
정확히 관측하고 지형을 정밀하게 측정해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피카르는 위도 1도를 5만 7,060트와즈라고 추산했다. 1트와즈는 2m
에 약간 못 미치는 길이로, 5만 7,060트와즈는 111Km에 해당했다.
그는 이 수를 승수 삼아 지구의 지름을 653만 8,594트와즈, 즉 1만
2,554Km로 계산했다. 오늘날 계산한 실제 수치는 1만 2,713K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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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국 가
삼각측량이라는 수학을 이용해 거리를 측정하면 특정 지점의 위치를 빈
공간에 정확히 표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무질서하고 번화한 프랑스의
모습이 아니라 추상적인 기하학 사슬을 닮은 지도가 탄생했다. 완성된 지
도는 <개정판 프랑스 지도>라는 제목으로 1684년 2월에 드디어 아카데
미에 제출되었다. 왕은 말할 것도 없고 아카데미 회원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1680년대까지 주요 연구 목표는 여전히 지구의 크
기와 모양을 알아내는 대규모 측정이었다. 게다가 측량사들이 임무를 완
수하는 동안, 루이 14세 군대는 스페인이 점령한 네덜란드 일부를 침략해
전쟁을 촉발했다. 피카르가 죽고 뒤이어 콜베르마저 사망하자 루이는 군
대에 많은 비용을 지출했고, 그러다보니 시작한 작업을 확대할 재정을 지
원하기가 어려워졌다.
1735년 1차 원정대가 적도 부근의 스페인 식민지 페루를 행해 출발했고,
이듬해에 모페르튀이가 이끄는 2차 원정대가 북극권에 있는 라플란드로
향했다. 모페르튀이가 계산한 위도는 지구가 적도에서 약간 불룩하다는
뉴턴의 믿음과 맞아떨어졌다. 1744년에 돌아온 페루 원정대 역시 뉴턴의
이론을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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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국 가
1730년에 필리베르 오리가 루이 15세의 재정감독관으로 임명되면서 “국
가의 이익과 대중의 편의를 위해”, 1733년에 카시니 2세에게 전국적으로
삼각측량을 재개하라고 지시했다.
작업이 끝난 1738년, 위도를 다시 계산하고 보니 모페르튀의 라플란드 측
정이 옳았다. 프랑스 땅에서 실시한 측정도 마침내 뉴턴의 이론이 옳다고
증명한 꼴이 되었다. 카시니 3세가 측량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면 카시
니 혈통의 영향력은 여기서 끝날 수 있었다. 1744년의 측량도 발행으로
콜베르와 오리의 원래 계획이 실현되었다.
1756년 여름, 카시니 3세는 루이 15세를 알현하고 갓 찍어 낸 보베 지도
를 받쳤다. 국왕은 “이보게 카시니, 정말 미안하게 됐네만, 자네에게 안 좋
은 소식이 있어. 지원해 줄 돈이 없어” 그는 국왕의 말에 그답게 단호하게
대답했다고 회상했다. “지도는 완성될 것입니다.”
그는 국왕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지도협회’를 조직했다. 정치적, 재정적으
로 뛰어난 조치였다. 귀족과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이 계획에
동참했고, 심지어 왕의 정부인 폴파두르 부인까지 합세했다. 카시니 3세
는 하마터면 폐기될 뻔한 측량 사업을 몇 주 만에 되살리고 이후의 자금
지원을 확보하면서도 정부나 주주의 간섭은 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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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국 가
1756년에 발행한 첫 번째 지도는 누가 봐도 놀라운 성취였다. 측량에서
발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를 꼼꼼히 감독했던 카시니 3세는 정밀함,
세밀함, 정확성, 표준화에서 독보적인 일련의 지도를 만들었다. 프랑스 왕
국은 구석구석 어디든 똑같은 원칙으로 지도에 표시된다는 것이다.
70대를 바라볼 무렵 아들 장도미니크 백작(카시니 4세)이 측량에 합류했
다. 그러나 1784년, 카시니 3세가 천연두에 걸려 일흔 살의 나이로 세상
을 떠났다. 정치 상황이 하루가 멀다 하고 악화되자 카시니 4세는 혁명으
로 치닫는 프랑스의 지도를 완성하는 데 박차를 가해 ≪삼각형 모음 지도
≫를 추가했다. 새 정권이 적대적인 이웃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하면
서 군은 지도에 주목했다. 군 공병단 단장 장클로드 르 미슈 다르송은 “그
의 지도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좋다면 금지해야 하고, 나쁘다면 특
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
천문대
감옥에
튀리에
카시니
지켜야
했다.
대장직뿐 아니라 아카데미 회원직도 빼앗긴 그는 1794년 2월에
갇히고 만다. 감옥에서 풀려나 환멸과 멸시를 느낀 장도미니크는
있는 집으로 돌아가 1845년 아흔일곱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도는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반복되는 국가적 자기희생에서 싸워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 지킬 가치가 있는 국가의 모습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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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정학 - 런던
1831년 5월 24일 저녁, 여행과 탐험에 경험이 많은 '롤리 여행자 모임'회
원들이 모였다. 롤리 여행자 모임에서 '왕립지리학회'가 출범했다. 1796년
에 독일 판화가 알로이스 제네펠더는 석판인쇄를 우연한 기회에 발견했
다. 석판인쇄가 계속 발전하면서, 지도에 색과 사진도 넣을 수 있게 되었
다. 1863년에는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카토그래퍼'라는 말이
사용되었고, 1880년대에는 카토그래피와 카토그래퍼, 두 단어가 어휘 목
록에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이 발전하면서 지도 투영법에 관심이 촉발되어 16세
기의 여러 혁신적 투영법에서 훨씬 더 발전한 투영법이 나왔다. 1800년과
1899년 사이에 지도 투영법이 새로 53개나 나왔는데, 18세기를 통틀어
나온 투영법의 세 배가 넘는 수다.
19세기의 지도책은 거의 다 세계지도에 여전히 메르카토르 도법을 이용
했지만, 반구나 대륙지도에는 10여 가지 투영법을 다양하게 사용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주제도'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했다. 주제도는 사
회과학 발전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자연과학에서 자료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분류하고 표시하게 했다. 생물학, 경제학, 지질학 모두 이 새로
운 방식을 이용해 지구의 대기, 대양, 동식물, 지표면을 지도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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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정학
유럽이 지도 제작을 이용해 제국의 영토권을 주장한 가장 악명 높은 사례
는 아마도 1884~1885년 아프리카에서 열린 베를린 회의일 것이다. 이 회
의는 지금도 제국의 '아프리카 쟁탈전'의 시초로 간주된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이 영국 교수 해퍼드 마킨더였
다. 영국에서 지리학이라는 학문을 혼자 바꿔 놓다시피 하고, 지정학이라
는 주제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한 사람이다.
매킨더는 처음에 런던에 있는 '이너 템플'에서 국제법을 연구할 준비를 했
고, 그와 동시에 대학 공개강좌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대학 공개강좌 운동
은 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해 공부할 기회가 없는 성인에게 교육 기회를 제
공하려는 취지에서 시작한 운동이다.
그는 처음에 옥스퍼드에서, 다음에는 전국을 돌며 지리학을 앞장서 가르
쳤고, 인문지리를 정식으로 연구하는 학교가 없다는 현실을 고려해 1893
년에는 여러 사람과 함께 지리협회를 만들었다.
1895년 9월, 매킨더는 지리협회에서 회장연설을 했다. '근대 지리학, 독일
어와 영어'라는 연설에서 그는 19세기 지리학과 지도 제작 발전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 주었다. 매킨더가 걱정하는 부분은 영국 지리학자들
은 독일 지리학자들과 달리, 지리학 연구의 실용성을 전면적 이론에 통합
할 줄 모른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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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정학
“지리학은 실재하는 사실을 보고, 분석하고, 무리 짓는 명확한 관점이며,
따라서 신학적 또는 철학적, 그리고 언어학적, 수학적, 물리학적, 역사적
관점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믿음을 실현할 수단은 중앙집중화였다.
1898년 매킨더는 케냐 산 등반 계획을 발표했고, 이로써 동아프리카에서
경쟁하는 두 제국 사이의 경주가 시작되었다. 9월 13일 정오에 드디어 정
상에 도착했다. 매킨더는 정상의 높이를 5,240m 로 측정했는데, 실제 높
이인 5,199m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치였다.
매킨더는 최초로 프레더릭 아이브스의 새로운 컬러 사진술을 과학 원정
에서 사용했고, 산과 자신이 지나간 길을 표시한 아름다운 지도 세장을
그렸으며, 원정에서 돌아온 지 두 달이 지난 1900년 1월 22일에 왕립지리
학회에서 강연을 하고 그 내용을 석판인쇄로 남겼다. 이 지도는 제국의
과학 지도 제작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1900년 1월에 학회 부회장인 토머스 홀디시 경은 “과학 지리학자로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진 그가 가장 성공한 여행가로서, 동아프리카의 주요 정
상인 케냐 산을 오른 최초의 인물로서 오늘 밤 우리 앞에 섰습니다.” 성공
한 지리학 교사로서, 용감한 탐험가로서 확고하게 입지를 다진 매킨더가
빅토리아시대 말기의 영국에서 자신의 분야를 지적인 학문으로 당당하게
인정받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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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정학
왕립지리학회는 문을 연 지 70년이 넘은 1904년 1월25일 저녁에 런던 중
심의 새빌로 1번지에 있는 학회 건물에서 매킨더에게 글을 발표하게 했
고, 특별회원들에게 그것을 경청할 기회를 마련했다.
매킨더는 지리학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뒤, 핵심 논지로 들어갔다. 그는 당
시 팽배한 영국의 제국주의적 이상과 반대로 “세계 정치의 중심”은 중앙
아시아 또는 그가 말한 “유라시아”라고 주장했다. 그는 “러시아가 몽골 제
국을 대체한다”고 경고하면서 “방대한 대륙의 자원을 이용해 선단을 건조
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제국이 출현할 것”이다. 그는 현재의 영국
외교정책을 직접 거론하면서, “독일이 러시아와 손을 잡으면” 그런 상황
이 발생하리라고 경고했다. 거대한 이 두 제국은 서유럽에서 중국의 태평
양 해안까지, 그리고 남쪽으로는 페르시아 중부와 인도 국경에 이르기까
지 전 세계에서 지리적으로 핵심인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것이다. 시
기 적절한 관찰이었다.
매킨더는 이 새로운 세계 질서를 그린 지도로 그려 슬라이드를 이용해 설
명했다. 처음에는 동유럽과 아시아 지역지도를 보여주었고 나중에는 자신
의 주장을 생생하게 표현한 세계지도를 제시했는데, 이는 훗날 “지정학
전통에서 가장 유명한 지도”로 평가 받는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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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정학
1943년 7월, 전세가 연합국에 유리해지면서 매킨더는 <둥근 세계와 평화
달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그가 평생 두려워한 독일과 러시아
의 동맹은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으로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1942년에 독일의 정치학자 한스 바이게르트는 매킨더의 1904년 발표를
회상하며, 많은 영국인에게 “충격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였으리라”고 썼
다. 그러나 매킨더가 세상을 떠난 1947년 무렵에는 그의 주장이 당시 가
장 영향력 있는 정치 이론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메킨더가 죽은 지 7년이 지난 1954년에는 유명한 미국 지리학자 리처드
하츠혼이 매킨더의 원래 모델은 “세계 권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것이었
는데,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정치 세계를 바
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미친 가장 유명한 근대 정치지리학이 되었다”고 주
장했다.
매킨더 이론의 중심에는 세계지도가 있었고, 이 지도는 그 후 지리학자와
정치인들 손에서 끝없이 복제되면서 지정학이라는 개념에 생생한 형태를
부여했다. 매킨더의 위대한 업적은 이 모든 것을 바꾸고, 이 과정에서 근
대 지리학과 지도 제작이 정치학이나 제국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 상관
관계를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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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평등 - 인도
1947년 6월, 법률가이자 전직 정보부 장관 시릴 래드 클리프경은 영
국 정부의 위임을 받아 인도 대륙을 보고하기 위해 난생처음 인도를
여행하게 되었다. 그의 임무는 인도 대륙을 종교에 따라 힌두교와 이
슬람교로 나눠 인도와 파키스탄을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래드클리프가 만든 분할 지도가 초래한 재앙은 빠르게 퍼졌다. 새 국
경지대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 현장으로 변했고, 많게는 100만 명이 집
단 학살에서 목숨을 잃었다. 카슈미르에서 무슬림이 대다수인 지역이
인도로 들어가고 무슬림이 소수인 지역은 그대로 남은 상황에서 1947
년 말이 되자 인도와 파키스탄은 국경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1965년과 1971년도에도 이어졌으며, 두 나라의 긴장 상태는 오늘날
까지도 계속된다.
재앙을 몰고 온 인도 분할은 18, 19세기의 야심차지만 불완전한 지도
제작 사업이 낳은 결과이자, 국가 건설과 제국 팽창에 대한 집착이 낳
은 불가피하지는 않을지언정 논리적으로는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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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평 등
1973년 5월, 독일 역사학자 아르노 페터스가 당시 서독 수도인 본에서 기
자회견을 열었다. 페터스는 회견장에 모인 350명의 외신 기자들 앞에서
자칭 ‘페더스 도법’을 기초로 만든 새로운 세계지도를 발표했다. 페터스는
자신의 지도가 각 나라와 대륙의 크기와 면적을 “정확하게” 유지하는 소
위 “정적도법”을 구현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메르카토르의 유럽 중심적 편견”을 수정하고, 지구상의 모든 국
가에서 “평등”을 실현했다. 페터스 도법과 페터스의 메르카토르 공격의
여파는 엄청났다.
1980년에는 ‘브란트 보고서’의 표지에 장식, 1983년에는 잡지 <뉴 인터내
셔널리스트>특별 호에 “놀라운 세계지도”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누구보
다 열렬히 지지한 곳은 유엔이었다.
그러나 대중매체와 진보적인 정치, 종교 기관이 페터스의 지도와 제작법
을 재빨리 받아들인 반면, 학계는 경악과 경멸로 반응했다. 영국 지리학자
데릭 메일링은 “궤변과 지도 제작의 기만을 보여 주는 놀라운 행위”라고
혹평 했고, 역시 영국 지리학자 노먼 파이는 “엉터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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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평 등
페터스 도법에 가장 신랄한 저주를 퍼부은 사람은 아서 로빈슨이었다. ≪
새 지도 제작법≫은 지도 제작이라는 학문을 “영악하고 교활하고 기만적
으로 공격”하지만, 그 방법은 “비논리적이고 잘못된 엉터리이고 논리는
겉만 번드르르해서 더러는 누가 봐도 엉터리”라는 주장이다.
독일지도제작협회는 “페터스 지도는 세계의 모습을 왜곡해 전달한다. 그
것은 결코 현대적인 지도가 아니며, 우리 시대의 세계적, 경제적, 정치적
관계를 다각도로 보여 주지도 못한다!”
논란의 양쪽에 선 사람들은 자기네 쪽이 객관적 진실이라고 주장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서도 곧 좀 더 주관적인 믿음과 기득권 세력의 개인
적, 조직적 이해관계가 드러났다. 논쟁은 점차 지도 제작의 본질에 관한
깊은 고민으로 바뀌어갔다. 페터스 덕에 지도 제작자와 일반 대중 모두
지도는 다소 편파적이며 따라서 정략적이라는 사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페터스는 1952년에 ≪공시적 세계사≫를 출간했다. 페터스는 “역사를 평
등하고 균형 있게 다루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된 냉
전 체제에서 페터스 같은 학자의 진보적 노력은 <프리먼> 같은 우익 잡
지뿐만 아니라 독일사회당 같은 좌익 세력의 이념 공격에도 먹이가 되기
십상이다. 결국 유통된 책 가운데 일부가 회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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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평 등
페터스는 자신의 지도가 독창적이고 정확하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이 투
영법은 약 한 세기 전에 스코틀랜드의 복음주의 목사 제임스 골이 발명한
방법이었다. 페터스는 골 도법을 몰랐다고 줄곧 주장했지만, 그가 지도 투
영법의 역사에 몰두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라운 주장이다.
페터스 도법을 적용한 사례들을 보면 제작자가 지도를 포괄적이라느니,
객관적이라느니 아무리 주장해도 프톨레마이오스 이래로 개인이나 단체
는 세계지도를 이용해 자신의 상징적,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는 사
실이 선명히 드러난다.
카시니 집안의 측량처럼 세계를 투명하게, 이성적으로, 과학적 객관성을
유지해 지도에 표현할 수 있다는 18세기의 믿음은 19세기 말부터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페터스 도법은 이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지만, ≪페터스 세계 지도책≫에
서 인구, 경제성장, 사회문제 등을 다룬 주제도는 21세기 초에 나온 대부
분의 지도책에 흡수되었다.
세계지도는 어느 것이나 불완전하고 태생적으로 선별적이라는 점, 그래서
불가피하게 정치에 희생된다는 점이다. 지도 제작계는 아르노 페터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어느 정도는 페터스 ’덕분에‘ 이 교훈을 여전히 곱씹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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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보 - 미국
지구 표면에서 1만1,000Km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검고 텅 빈
아득한 공간을 회전하는 행성이다. 햇빛은 지구표면을 비추고, 그곳에는
구름도 물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해저는 여전히 군청색으로 반짝이고, 대
륙은 초록과 갈색과 분홍이 어우러진 매력적인 조각보다. 북아프리카, 유
럽, 중동, 중앙아시아가 지구 오른쪽 절반에서 초승달 모양으로 곡선을 그
린다.
대서양은 바닥 왼쪽을 차지하고, 북아메리카는 끝부분만 슬쩍 보일 뿐이
다. 눈부신 백색 그라운드는 지구 꼭대기를 장식한 채 북극을 넘본다.
이 지구의 모습은 신의 관점에서 상상한 전지적 공상이 아니다.
구글어스 홈페이지에서 본 지구의 모습이다. 구글은 방대한 지리 정보를
인터넷에 무료로 풀어 놓았을 뿐 아니라 다양한 비정부기구가 환경 운동
을 하고 전 세계의 자연 재앙과 내전에 인도적으로 대응하는 데 구글 애
플리케이션을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구글어스는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이 분야 애플리케이션의 표준을 마련
했을 뿐 아니라 지도의 지위와 지도 제작의 미래를 완전히 재평가해, 지
도 제작을 그 어느 때보다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작업으로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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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 보
구글어스 제작자들은 지리학도, 심지어 지도 제작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 지리공간 애플리케이션 탄생의 계기가 된 기술 혁신
은 컴퓨터과학자들, 그리고 오늘날 흔히 ‘지도 제작자’보다는 ‘지리 공간
과학기술자’라고 부르는 가상 지도 제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왔
다.
구글이 어느 때보다 정교한 애플리케이션을 내놓으면서 법의 허용 범위
를 시험하는 상황에 이르자 ‘공간법’ 분야가 새롭게 발전하면서 구글과 보
조를 맞추려 하고 있다.
카스텔스는 1998년에 쓴 글에서, 우리는 “정보 중심의 기술 혁명”을 겪고
있다면서, 이런 사회를 가리켜 컴퓨터로 처리되는 정보망을 중심으로 사
회적 행동이 조직되는 네트워크 사회라 불렀다. 네트워크 사회는 카스텔
스가 말한 “현실적 가상”을 낳는 새로운 소통 체계를 의미한다.
새넌은 모든 메시지가 1과 0으로 구성된 음파를 통해 디지털로 전달되고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만약 이진수를 사용하면 그 기본 단
위를 이진 숫자, 더 간단히 ‘비트’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비트라는 말이
셋 수 있는 정보의 기본 단위를 뜻하는 말로 처음 사용된 순간이다. 오늘
날 많은 컴퓨터공학자에게 섀넌의 글은 정보화 시대의 ‘대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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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 보
키홀은 당시 앨 고어의 ‘디지털 지구’ 개념을 이어받아 어스뷰어 애플리케
이션 개발에 착수했다. 2001년 6월, 키홀은 어스뷰어 1.0을 내놓아 업계
전반에서 찬사를 받았다. 키홀은 2004년 말까지 어스뷰어를 여섯 종류를
내놓았다. 그리고 구글이 나타났다. 2004년 10월 인터넷 검색엔진 구글이
키홀을 인수했고, 인수금액은 비밀에 부쳤다.
구글은 전 세계 정보를 체계화하여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
고자 했을 뿐 아니라 몇 가지 믿음을 추구했는데, 이는 기업 강령에도 나
타난다. “인터넷은 민주주의가 통하는 세상이다.” “정보의 필요성에는 국
경이 없다.” 그리고 가장 논쟁적인 강령도 있다. “악마 짓을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다.”
구글은 키홀을 인수한 지 8개월이 지난 2005년 6월, 새로운 무료 다운로
드 프로그램인 구글어스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2008년 6월, 구글
은 지도 애플리케이션 내부에 ‘맵메이커’를 새롭게 선보였다. 지금은 구글
맵에 통합된 이 기능을 이용해, 현재 세계 180여 개 국가에서 누구나 자
신의 지역에 도로, 회사, 학교 등을 직접 첨가하거나 편집할 수 있다. 구글
어스는 조만간 ‘현실적 가상’이라는 세계 그림을 제공할 예정이며, 이를
제약하는 것은 오직 군사적, 법적 제재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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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 보
지도 제작 역사가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문제는 과부하가 걸릴 정도
로 많은 양의 정보를 어떻게 따라가느냐는 것이다. 구글과 구글의 지
리 공간 애플리케이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자료를 따라잡는
다고 해도 그것을 지도로 만드는 일은 언제나 계속될 것이고, 프톨레
마이오스나 알이드리시, 카시니 집안사람들도 인정했듯이 그 과정은
끝이 없을 것이다.
1970년에 미국 지리학자 월도 토블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
겼다. “지리학 제1법칙은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지만
가까운 것은 먼 것보다 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구글은 토
블러의 제1법칙에서 인터넷상에서 세계지도를 만드는 방법뿐만 아니
라 그 정보로 돈을 버는 방법까지 간파한다.
우리는 새로운 지리학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지리학은 전에
없던 단 하나의 목표, 수량화한 정보를 독점해 경제적 이윤을 축적한
다는 목표를 추구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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