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대중문화 - Starl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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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근대의 대중문화 - Starlings

제 12강. 경성 슈스케☆
대중가요로 본 일제강점기
- 근대 레코드사를 통해 본 대중문화의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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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요 TV에서 한창 화제가 되었었던 <슈퍼스타K>라는 프로그램을
다들 아실 겁니다. <슈퍼스타K>는 대한민국의 케이블 방송 엠넷의 대
국민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우승자는 엠넷의 연말 시상식에 출전
권이 주어지며 그밖에 고액의 상금과 상품을 받습니다.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달콤한 기회가 아닐 수 없는데
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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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가 되고픈 사람들
우린 모두 많은 사람들 속에서 화려하고 거창하게 뜨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 가진 원초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욕망 중 하나인지
도 모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혹은 유사한
‘인간의 본성’ 같은 것 말입니다. <슈퍼스타K>와 같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는 기회(물론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겠지만)가 비일비재 해지고 있는 요
즈음. 그래서 부쩍 커서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청소년들이 많아진
것일까요....?
12강. 경성 슈스케 라는 제목의 오늘 강의에서는 거대한 정치적 흐름에
가려졌던 근대 역사의 작은 줄기들을 찾아내고 읽어내는 시간을 가지려
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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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대중문화
‘대중문화’란 대중 사회를 기반으로 성립되는 문화를 말합니다. 근대
의 대중문화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중문화가 아니었습니다. 가
요나 영화, 기차, 신문 등 모두 일부 상류층에서나 향유할 수 있는 귀족
문화였지 일반 서민 대중들은 누릴 수가 없었죠.
오늘날과의 차이점은 분명 존재하겠지만, 근대의 대중문화는 여전히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근대 조선인의 삶과 욕망이 지
금 우리와 다르지 않으며, 그때의 사회상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확
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근대 조선인이 선망했던 것은 자신이 진정 원하
는 것이 아닌 주어진 욕망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
대인 역시 점점 더 자본주의적 욕망에 물들어가고, 근대화된 시간관념
속에서 개인적 시공간도 잃어버린 채 매스미디어와 신기술에 잠식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역사는 영원히 되풀
이될지도 모르는 것이죠.
근대의 대중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책을 한 권
소개하려고 합니다. 대중문화 가운데 가요에 치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참고하시면 수업 내용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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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가 태동한 공간 경성, 6개의 레코드사
자,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시대에 대중가요가 싹트게
된 모습을 ‘경성’이라는 공간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일제시대 대중가
요는 전통가요부터, 일본노래의 번안곡, 트로트, 재즈송 등을 거치면서 조
금씩 발전하였고 점차 우리식 창작곡과 대중가수들이 활약하면서 그 폭
을 넓혀갔습니다. 다시 말해 일제시대 특히 1930년대는 대중가요가 태동
한 시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장소적 배경이 되는 경성은 오랜 역사의 도시답게 번영과 수난의 역사
가 엉키어 있고 여러 계층이 뒤섞여 저마다 유기적 역할을 다 하고 있는
미스터리한 사건의 배경이 되기에도, 혹은 실마리를 풀 열쇠를 쥐기에도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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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로 접어들면서 대표적인 6개의 레코드 회사가 레코드 전쟁을 벌이며
경쟁하기 시작했는데요, 1920년대 후반부터 해서 1933년에 생겨난 ‘빅타’,
‘콜럼비아’, ‘포리돌’, ‘시에론’, ‘오케’, ‘대평’이 바로 그것입니다.
1910 빅타 레코드사가 백춘재의 레코드를 발매한 뒤 한국시장에 본격적인
음반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930년대는 이러한 복합성을 띈 음악장르가 아
리랑과 함께 공유되었죠. 당시 신민요가수인 선우일선과 이난영은 ‘레코드 취
입’을 통해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때부터 ‘아리랑’은 많은 창가가수들에 의해
녹음되고 보급되었습니다.
1934년 일제의 탄압 속에 우리 민족 고유한 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사
업의 하나로 OK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 애향가요 가사 현상공모에서 ‘목포
의 눈물’이 1등으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원래 제목은 목포의 노래였는데 오
케 레코드사 사장 이철이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어 작곡가 손목인에게 작
곡을 의뢰, 목포 출신의 가수 이난영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하여 음반은 발매
되자마자 대히트였고 가요의 전성기를 엽니다. 당시 국민들의 애환을 담은 이
노래는 공동체 의식을 발현시켜주는 측면에서 여러 대중들에게 공감과 사랑
을 얻으며 유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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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5월 10일 자본금 60만 원으로 창립한 독일계 합작의 음반회사인
포리돌의 본사는 동경시 대삼구 제방정에 있었으며, 지점은 대판, 경성, 대련
에 두었습니다. 처음에 포리돌사는 서양 음반의 라이선스 제작과 일본 음반을
생산하였으며 1932년 9월부터 한국 음반의 발매를 시작하였습니다. 1929년
부터 한국 음반을 발매한 일본 콜럼비아나 일본 빅타보다는 한발 늦은 출발이
었죠. 한국의 음반 시장이 유성기 음반의 황금기로 접어들자, 포리돌사에서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규반의 가격이 1원 50전이었던 포리돌 음반은 내구성도 양호한 편이고
음질도 우수하였습니다. 훌륭한 연주자를 확보하여 다른 음반회사에 비해 경
쟁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전통가요 음반을 많이 발매하였으며, 인
기 있는 연주자와 신인을 비교적 균형 있게 기용하여 연주자 선정에 많은 노
력을 기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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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시에론사는 1931년 11월부터 1937년 전반까지 한국 음반을 발매한
음반회사로 일본 동경에 본사를, 서울에 지사를 두고 있었습니다. 시에론사는
서양과의 합작선이 없는 일본 회사였으므로 규모나 기술면에서 서양과 합작
하였던 다른 음반회사들에 비하여 열세를 보였는데요, 시에론은 ‘大衆本位,
興味中心(대중본위, 흥미중심)’을 회사의 구호로 삼아 처음부터 1원짜리 염
가판 위주로 음반을 제작하였습니다. 1937년 2월 이후에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이후 한국 음반 생산을 중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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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여러 레코드사가 경쟁하면서 대중가요의 확산을 가져왔던 그 당시.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왜색(친일)음악의 상흔이라는 점일 텐
데요.
1930~1945년대까지는 왜색음악의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일제 잔재가 뿌리내린 시대였습니다. 일각에서는 왜색 찬양 음악인들에 대해
당시의 정세나 민족적 억압시기, 정화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민족사안의 측면에서 한 국가의 문화적 정기를 책임질
창작인 들의 이 같은 매국적인 활동을 어떻게 포용하겠느냐는 문제도 강력하
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1937년부터 해방 전까지 폴리돌, 콜롬비아, 태평 등
일본 음반회사들이 발매한 친일음반 중에는 일본정책을 합리화하고 선전수단
으로 이용된 대중음악은 모두 41곡, 작사가 12명, 작곡가 13명, 가수 24명에
달했습니다.
국내 창작인들의 노래와 곡들은 일본의 음악적 우월주의와 또한 식민정책
의 일환으로 앞장 세워졌고 민족정기를 빼앗는 잔인한 문화적 침탈로 이어지
기도 했다는 점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친일음악
인의 과거에 대한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 큰 오류와 치욕의 상흔이지만 인정
할 것은 인정하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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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주교재인 경성리포트에서 발췌한 내용들 인데요, 당선작은 즉시
레코드로 취입되는 은전을 누리고 상금을 받았으며 단박에 작곡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던 것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요즘의 강변가요
제, 대학가요제처럼 신인 가수를 발굴하는 행사도 있었다니, 오늘날과 많이
유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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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보신 경성리포트 발췌 부분에서도 등장했는데요, 여러분 혹시 1930
년대 기생출신 대중가수 가수 왕수복을 아시나요? 왕수복은 일제강점기부
터 활동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가수입니다. 그녀에 관한 간략히 요
약해 놓은 글을 보시죠.
노래에 재능을 보인 왕수복은 10대 중반이던 1933년에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울지 말아
요〉와 〈한탄〉을 취입하여 최초의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가 되었다. 1935년에 《삼천리》
가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선우일선, 이난영, 전옥에 앞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
다. '유행가의 여왕'으로 불리며 인기 정상에 있던 193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개인 교습으
로 서양 음악을 공부했다.
근대는 왕수복 이외에도 많은 가수들이
활약했었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의 이효리. 왕수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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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지금까지 대중가요를 통해 근대의 대중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
았는데요, 경성이라는 공간 안에서 6개의 대표적인 레코드사를 통해 확산
되어갔던 대중가요의 물결을 살펴보면서 일제 식민시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갖는 여러가지 생각해볼 점들이 있었죠. 대중음악인들은 속히 대중음악
에 뿌리내린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국가경쟁력과 의용적인 창작열의를
고취, 고유의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날의 대중문화, 유행, 스타에 대한
열망들까지. 수업을 시작하면서 잠깐 언급했었던 슈퍼스타K. 그 영향력
은 정말 컸는데요, 케이블TV 역사상 기적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대
한민국 방송사들은 오디션 열풍이 일었습니다. 2010년 MBC의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 그리고 <K-팝 스타>, <아메리칸 아이돌>과 같은
각종 유사 프로그램들이 제작되었고 슈스케 역시 시즌 2, 3, 4를 거듭하
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새로운 아
나운서를 뽑는 <신입사원>이라는 방송까지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이 가수, 음악, 노래라는 장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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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TV 연예인이나 스타들, 걸그룹, 아이돌 가수들에 대한 관심. 그
리고 이미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어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로 뻗어나
가는 K팝까지... 문득 이러한 것들이 많은 대중들로부터 크게 사랑받고
인기를 얻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대중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 스타가 된다는 것. 꺼려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겠지만, 기회
만 주어진다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 보게 되는 부분이 아닐까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남들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픈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특별한 트랜드를 만들어 나가고 주도해 나가는 주체로써, 문화
아이콘으로써 역할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여러분들에게도 한번 묻고 싶
네요. 여러분은 어떤 분야에서 또 어떤 모습으로 뜨고 싶나요?
오늘 수업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