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갑장터 최여겸마티아.[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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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개갑장터 최여겸마티아.[20]

복자 최여겸(崔汝謙) 마티아(1763~1801.08.27)
“너는 사교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대답했다.
“나는 단 하나 뿐인 참된 종교를 따르고 있습니다.”
최여겸은 무장(현 고창)고을 양반 집안에서 1763년에 태어났다. 어떤 기록에는 그의 아버지가 무
장에서 작은 벼슬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신학문인 천주교에 대해 듣고 궁금
해 오다가 유항검 집을 찾아가 천주교를 배우고 1788년 25세의 나이에 세례를 받았다. 최여겸은
명성이 널리 알려진 윤지충을 찾아가 교리를 배운 후 신앙심이 더욱 두터워졌다.
또 결혼한 뒤에는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되었
다. 당시 그의 처가는 충청도 한산에 있었는데, 그가 이존창을 만난 것도 바로 이곳이었다. 처가
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며, 열성을 다해서 사방에 복음
을 전하여 그가 입교시킨 사람은 기록상에만 28명이 된다. 많은 사람을 입교시켜 전라도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우선 처가가 있는 한산으로 일단 피신하였다. 최여겸이 입교시킨 신도
들이 무장․흥덕․영광․함평 등에서 전주감영으로 끌려왔고, 이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최여겸의
활약상이 드러나고 말았다. 최여겸은 4월 13일(양력 5.25) 한산에서 체포되어 관아로 끌려갔다.
한산 관장은 주뢰질(두 다리를 한데 묶고 다리사이에 주릿대를 끼워서 비트는 형벌)과 몽둥이가
부러지도록 매질하며 고문하고 배교를 강요하였지만 그의 신앙을 꺾지 못하자 충청감사에게 사
실대로 보고했다. 충청감사는 한산 관장에게 무거운 칼을 씌워 최여겸의 고향 무장(茂長)으로 이
송토록 했다. 최여겸이 무장관아에 도착하자 숨 쉴 겨를 없이 관장은 문초를 하며 갖은 형벌로
고문을 했지만 그의 신앙은 요지부동이었다.
4월 19일 무장 관장은 전주감영으로 이송하였다. 최여겸은 전주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
만 여전히 굽히지 않고, 관장 앞에서 양반벼슬아치들의 수탈행위와 호색(好色)에 빠진 축첩행위
를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는 옥중에서 천만 뜻밖에 믿음이 독실한 교우 한정흠과 김천애를 만났
다. 최여겸과 두 동료들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모진 형벌을 받았지
만 그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1801년 7월 13일(양력 8월 21일) 형조(刑曹)에서는 이
들 세 사람 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해읍정법’(該邑正法, 고향에 보내져 벌을 받게 하는 제도)에 따
라 각각 고향으로 내려보내 처형토록 했다.
최여겸은 7월 19일 무장현 동음치면 개갑장터(현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장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천주교도들의 사형집행은 대개 장날
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믿으면 처참하게 죽는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전시효과를
노려 장날을 선택한 것이다.
신유박해 때 최여겸이 입교시킨 이런 신도들이 확인된다. 영광고을 양반으로 최여겸의 제자인
이 ‘화백’과 오 아무개(吳某)는 영광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고, 최여겸의 조카이며 영광 양반인
최일안(혹 ‘금노’)은 전주에서 받은 형벌로 병들어 죽었다. 그리고 최여겸의 제자 가운데 무장의
최천수(崔千壽)는 횡성으로 귀양가고, 함평의 남중만(南重萬)은 평산으로, 흥덕의 김처당(金處當)
은 청도로 귀양갔다.
주요자료 출처 :고창군청 홈페이지 종교편에서 발췌
● 《순조실록》 순조 1년 7월 13일 정해조에 보면
“호남의 한정흠(유황검의 먼 친척이며 아이들 선생,韓正欽, 1756~1801, 스타니슬라오), 최여겸, 노복
천애(유황검의 종임,金千愛, 1760~1801, 안드레아) 등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 그릇된 방면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천주를 독실하게 믿으며 교리를 따라붙어 익혀서 십계명을 버리기 곤란해 하고
죽음을 달갑게 받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울러 다시 자백을 받은 뒤 전주 감영으로 압송하여 각각 그
고을에서 사형에 처하소서.”라고 하였다.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에 나타난 신유박해 평가
“조선의 역사에 피로 쓴 글자가 새겨짐. 새로 생겨난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시민권을 획득.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 이 믿음이 없는 땅에 지옥이 뽑을 수 없고 또 세월이 결코 근절시킬 수 없을 뿌리
를 내린 것”(달레《한국천주교회사》上, 433쪽)
“역설적으로 윤음綸音(요즈음의 법령)과 포고(국가의 결정이나 의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일반에게
알림)는 오히려 아무리 활발하고 열심한 전교로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보편적으로 온 나라의
궁벽한 구석까지 복음을 알리게 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천주교인들이 있는 지방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순교자들의 용기와, 귀양 간 이들의 인내가
우상숭배와 물질생활에 깊이 빠진 이 나라 백성에게 계시가 됨. 즉 지식‧ 덕행‧ 사회적 지위로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새로운 교리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사실, 이 자체가 웅변적인
호교였으며 박해는 신앙의 눈으로 보아 훨씬 더 귀중한 결과를 낳았다.
천국에는 새로운 간선자(揀選者)가 생김, 조선 천주교회는 하느님 앞에 힘있는 전구자의 무리를 보냄.
나중에 갖가지 장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의 말이 구원의 열매를 풍부히 맺은 것은
순교자들이 기구한 덕택”(同書, 619쪽)
● 개갑장터
조선조 때 이 개갑[개가리(凱歌里)] 장터가 서게 된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공음
면의 대종을 이루는 성씨는 전주 최씨와 안동 김씨이다. 두 성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그들의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 차 머문데서 연유된다. 그 중 안동 김씨에는 김질(호 영모당)이라는 효자가 있었다.
진사로서 1496년(연산2년)에 동음치면 개가리(개갑)(현 공음면 석교리)에서 출생한 분으로 효성이 남
달리 지극하여 부모상과 조부모상과 조부모 승중상(承重喪)등 도합 12년간을 시묘살이로 일관한 사람
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생전에 꿩 고기를 몹시 좋아 하셨기에 그는 매년 12월 제사 날에는 짚신을
삼아 그곳에서 8km나 되는 안장 머리장(안자시장[鞍子市場], 현 해리시장[海里市場])에 가서 짚신을
팔아 꿩을 사서 제물로 쓰곤 하였다. 어느 해 눈이 많이 내려 시장이 서지 않아 제물을 구할 수가 없어
서 크게 걱정하면서 그는 그의 불효로 인하여 하늘이 내린 벌로 알고 제사 날을 맞이했다. 그런데 눈
이 많이 내린 그날 석양 무렵에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부엌으로 날아 들어와 벽에 부딛혀 죽어 있었다.
김질은 그 꿩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고이 모셨다. 그 다음 해에도 짚신을 등에 지고 눈 길을 헤쳐 제
물을 구하기 위하여 안장 머리장에 가는 도중 때마침 무장 원님께서 그 곳을 행차하다가 그의 모습을
보고 이 추운 날씨에 무엇 하러 가는 사람이냐고 물어 보았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원님은 김질의 효
성이 지극함을 극찬하고는 그를 위하여 개가리에 저자(시장)를 세워 주게 되어 평생토록 눈 길에 장을
보러 가는 고생을 덜게 되었다. 그 뒤로 퍽 번성해 오던 개가리 시장은 한일 합방 후 구한말의 의병활
동을 위한 보급소와 연락처로 낙인이 찍혀 왜인들이 물산의 중앙 집산지가 못 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끝내 없에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장터의 흔적조차 없이 그 이름만 전해오고 있다. 개갑장이
세워진 200년전만 해도 100호가 살았고, 1925년 경만해도 10여 호가 있었다고 한다. 개갑장은 전국에
서 유명한 우시장으로 소장달인 7월에는 장관이었다고 한다. 개갑장터는 고창 지역 최초의 천주교 순
교지이며, 전라도 지방 선교의 거점지이자 천주교 순교의 하한선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