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강 신정론과 죄악.[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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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적 관점에서 ‘죄’는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저버리는
모든 행위와 태도, 또는 삶의 과정을 의미한다. 죄는 죄인을 하나님
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죄인이 하나님의 공동체와 분열되도록 하며,
자신과 이웃의 삶을 파괴하고, 그러한 방법으로 피조 세계 자체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
다.(시51:4)”라는 어구는 시편기자의 죄 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데, 그는 진심으로 인간의 실존이 종교적으로 부패하게 되는 것을
죄라고 본다. 만약 우리가 ‘부도덕성(immorality)’을 근본적으로
반(反) 사회적으로 이해하고, ‘범죄(crime)’는 국가에 반대하는 것
이라고 간주한다면, ‘죄(sin)’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이다. 이 세 가지 혼란(부도덕성과 범죄, 그리고 죄)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문제인 죄(sin)는 또한 다른 두 문제인 부도덕성과 범죄에
도 영향을 미친다.
죄의 교리는 기독교가 처음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현대 이교도들이
기독교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인간의 삶
에 있어서 어긋난 무언가로 보는 죄 의식은 본래부터 근본주의나 청교
도, 또는 중세 가톨릭교회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전(全) 세계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된 개념이다. 즉 금기(tabu)와 두려움에 대한 관
념들이 곧 이러한 인간의 불안을 보여주며, 그러한 불안을 어떠한 신,
또는 신들의 불쾌함과 연관 짓도록 한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현상들의 내용은 히브리 성서에서 특정한 공통 용어들로 표현되
는데, 이러한 용어는 왜곡됨(crookedness), 또는 자기 비난을 의미하
는 ‘아원(awon)’, 자신이 행할 수 있는 행동의 한계를 반(反) 사회적으
로 무너뜨림을 의미하는 ‘하타아(chatta’ah)’,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존재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는 ‘페사(peshah)’ 등이다.
모든 죄는 실제적인 죄이며, 아무도 죄를 상속받은 채로 태어나지는
않는다고 보는 신학적인 입장은 매우 강력한 장점을 가진다. 이러한
방식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이며(창1:27; 히1:3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베푸시려고 오래 전부터 준비하신 계획과 연관이 된다.
물론 이 계획은 종종 아담과 그의 후손으로 인하여 좌절되었음을 성서
는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은 ‘불가능한 이상(예, Reinhold Niebuhr, impossible ideal)’, 또
는 성인군자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가 자비롭게 자기의 백성으로 부르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선택하신 것
이다. 그러나 이 방식 또한 몇 가지 이론적인 문제가 있으며, 이 약점
들은 오로지 원죄 개념을 더 밀접하게 연구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죄의 문제에 대한 다양한 입장과 해석들은 점차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입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1)율법주의(Legalistic theories)의 측면을 강조하는 이론은 죄
란 신적인 도덕법을 어기는 것으로 정의하는데(Calvin),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은
‘신-인 관계성’을 너무 쉽게 비인격화시킨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2)주관주의 이
론들(Subjectivist theories)은 믿음을 가지는 주체로서 인간을 설정하고 인간이
인간의 죄에 대한 유일한 원인이라고 설명하지만, 기독교의 도덕성과 경건성에
심각한 상대주의를 주입시킨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3)주의주의(主意主義)적
이론들(Voluntarist theories)은 죄를 인간의 고의적인 비행의 문제로 제한하며
(Kant) 도덕적 의무에 대하여 강조하지만, 신의 거룩성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관에
대하여 적절치 못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는 인간의 의지와 본성의
문제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다. (4)물리주의적 이론들
(Physicalist theories)은 가톨릭 교회의 도덕 신학적 설명과 비슷하게 죄의 원인
을 그 죄를 유발하는 물리적 상태와 육체적 행위로 제한하는데, 이 이론들 또한
죄 자체에 대한 종교적 개념을 상실한다는 약점이 있다. 이 네 이론들 각각은 죄
의 본질에 대하여 어느 정도 명백히 해주기는 하지만, 이 네 이론 중 그 어떤 이론
도 죄에 대한 폭넓은 관점, 또는 죄에 대한 기독교의 독특한 견해를 충분하게 담
아내지는 못한다.
어거스틴은 플라톤주의자들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이 세상은 이원론
적인 경향, 즉 감각-육체적인 것과 지적-영적인 것 사이의 근본적 분
리가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마니교나 영지주의와 같
은 도덕적 이원론을 반대하고, 그 이원론적인 경향을 극복하는 하나님
의 절대 은총에 대하여 강조한다. 어거스틴이 보는 이원론적 분리는
궁극적인 연합성으로부터 시작하며, 다양성이 증가하는 다양한 단계
를 통해 발전하는 더 큰 연합된 위계질서 하에서의 분리를 의미한다.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은 궁극적 근원으로서 모든 존재는 그 근원점으
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신은 불변하는 점으로서,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이성적 위계를 통해 서로 통합될 수 있다.
아퀴나스는 죄 때문에 차라리 존재하지 않고 비존재로 있는 것이 더 나
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은 잘못 되었다고 지적한다. 어떤 의미에서
비존재는 바람직하여 보이는데, 이유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죄와 연관
하여 상대적으로 그러하다. 어떤 의미에서 악이 없는 상태는 비존재의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존재는 악이 없는 존재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또한 상대적인 선이다. 따라서 존재가 선을 추구하
며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그 존재를 유지할 때 존재로 있는 것이 더 좋다
고 할 수 있지만, 이를 인간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다.
아퀴나스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은 악 때문이 아니며 오히려
선이 있기 때문에 악이 알려진다고 보았다. 오히려 악은 악에 의해 전혀
영향 받지 않는 신적 본질과 반대된다. 악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에 배
치되며,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본질에 의하여 알려지신다.
죄는 논리적으로 보아 죄의 결과에 이를 때면 그 자체로 막강한 힘을
소유하는데, 성경은 이 죄악의 구조에 대하여 사단의 영역과 연관이
되어 ‘정사와 권세(principalities and powers)’와 동일시한다고 사
이몬 찬은 해석하였다. “죄는 강력하고도 교묘한 정신(spirit)의 형태
를 취한다. 그것은 한 시대나 단체나 국가, 혹은 정치 운동이 기치로
내거는 정신의 형태로 나타난다. 죄는 제도와 전통의 중심부에 잠복
해서, 그 곳을 본거지로 삼아 그것들을 탈취한다. 탈취를 통해 형성
된 새로운 구조는 왜곡(perversion), 무형태(formlessness), 혹은 과
도한 경직성이 혼합되어 있는 양상을 띠는 것 같다.”
죄론은 율법주의와 주관주의, 주의주의와 물리주의적 설명에 내재된
진리를 다음과 같이 포용하며 수용할 수 있다. (1)신적 명령이 존재하
는데, 때로는 율법의 형태로 존재하며, 죄인들은 그러한 신적 명령을
위반한다. (2)그렇게 행함으로써, 죄인들 자신의 자아를 왜곡하고 거부
하게 된다. (3)죄는 때때로 난폭하게 고의로 저지르는 사악함을 초래한
다. (4)우리는 스스로를 현실화하며, 우리가 저지르는 죄는 우리가 행
한 정의로운 행위와 마찬가지로 실제 우리에 의하여 자행되는 현실적
인 행위이다. 그러나 죄로 드리워진 어두운 세상에 이와 같은 제한적인
설명들을 통하여 죄의 문제를 이해하려고 하더라도, 인간과 세상의 구
원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충분한 해석이 될 수는 없
을 것이다. 그 대신에 이 죄 론은 모든 생명의 제한성을 설명하는 기준
으로서 아무리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
도, 또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것 자체
가 무엇이든지 ‘죄’라는 고백으로 이끄는 진리의 기준이 될 것이다.
현 개신교가 ‘값싼 은총’의 문제에 직면하여 발생하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죄’에 대한 이해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이 타락하여 저
지르는 죄의 유형을 ‘생략의 죄(sin of omission)’와 ‘위반의 죄(sin of
commission)’로 설명하였다. ‘생략의 죄’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
이며, ‘위반의 죄’는 더욱 더 죄를 짓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이 두 종류
의 죄는 차이가 없는데, 예를 들어서 욕심 많은 인간이 타인의 것을 돌
려주지 않으면 ‘생략의 죄’이며, 타인의 물건을 절취하는 것은 ‘위반의
죄’가 되는 것이다. 이 죄가 은총의 문제와 연결되면, 인간은 죄를 짓고
도 자신이 지은 죄의 책임을 스스로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고 죄를 생략
하는 ‘생략의 죄’를 야기하게 될 것이며, 만일 하나님이 용서하여 주실
것을 믿고 담대하게 죄를 짓게 되면 ‘위반의 죄’가 반복되게 되는 것이
다. 필자는 위의 ‘생략’과 ‘위반’의 죄에 더하여 ‘복종의 죄(sin of
submission)’, ‘허용의 죄(sin of permission)’, 그리고 ‘전가의 죄(sin
of emission)’를 생각하여 보았다.
죄를 내버려 두면 죄는 개인들뿐만 아니라 인간 구조와 사회에도 영
향을 미친다. 루터의 말처럼 우리는 세상의 여관에서 종노릇하고 있
는 것과 같다. 비유로 말하자면, 그 집 주인은 마귀이고, 집주인의 애
첩은 이 세속적인 세상이며, 그리고 모든 종류의 악한 열정들이 이
세상 속에 가득 차있다. 따라서 “인간 사회 속에 고유하고 자리하고
있는 구조적인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인간 사회를 긍정할 수 없는 것이
다.” 죄는 개인 차원에서가 아닌, 구조 차원의 문제로 사회 전체에 영
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유대전승과 기독교전승은 자연 사건에 의해 일어나는 비극적이며, 인간
의 관점에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그
들은 역사의 틀 안에서 고난과 직면하여, 왜 인간이 고난을 받아야만 하
는가에 대한 질문을 현저하게 ‘윤리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세계의 기원
에 관한 유대교의 관점은 처음부터 고난을 창조의 선(善)에 반하는 것으
로서 간주했다. 가부장적 지배와 쉼 없는 고된 노동, 그리고 인간과 자
연 사이의 적대감은 타락한 세상이 만들어낸 일종의 ‘저주’이지, 하나님
의 뜻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고난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는 사랑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되거나 자
신들이 자처한 폭력에 의해 하나님과 갈라선 결과로 말미암아 생긴 것
으로 볼 수 있다. 카인은 “너의 형제는 어디에 있느냐?(창4:9)”라고 물
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내가 나의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대
답한다. 이러한 카인의 대답은 우리가 서로를 향한 유대감에 대한 거부
를 의미하며, 그리고 생명의 수여자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나타낸다. 생명은 서로 소중히 여겨야 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지진과
같이 무자비한 자연적 고난이 닥칠 때,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
람들이라 할지라도 도울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이웃들을 자신의 친 형
제들처럼 대하여 줄 수 있는 것이다.
C.S.루이스는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에서 고통의 이유
는 하나님이 우리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원하는 것보
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C. S. Lewis가 다
루고자 하는 고통은 신경계통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자신을 양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영적인 문제로 보고 있
다. 즉 고통의 문제를 인간의 항구적인 죄의 문제와 깊게 연관되어 있
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루이스가 인용하는 뉴먼(John
Henry Newman)의 말처럼, “단순히 개선될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놔야 할 반역자들”이다.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의 영혼은 인
간적으로 자신에게 상황이 유리할 때는 아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
나 고통이 따를 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잠시나마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된다.
루이스가 설명하는 고통을 통한 구원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관점을
가지게 된다.
첫째, 타락한 이 세계가 구원받는 과정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단계를
거치는데, 그것은 (1)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2)타락한 세계와 악을 치
유하기 위하여 (3)악을 사용하시고, 그리고 (4)고난을 통하여 인간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시는 것이다.
둘째, 시련의 지속되며 이 세상이 구속함을 받기 까지는 고통은 지속
된다.
셋째, 그리스도인이 보는 악의 관점은 전적으로 신학적인 것으로서 정
치와는 별개의 것이다.
넷째, 이 세상에 때때로 좋고 행복한 것이 있지만, 그것은 다 임시적인
것이다. 비유로 여관이 집은 아니다.
다섯째, 고통의 총화는 없다. 고통 x가 또 다른 고통 x와 합쳐져서 2x
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개인이 당하는 고통은 그 자체로 최고의 고통
이다.
마지막 여섯째로, 모든 악 중에 고통만이 살균 소독된 악이다. 고통은
반드시 끝이 있다. 고통은 증식하지 않으며, 이것이 지나면 기쁨이 오
게 되어 있다.
C. S. Lewis는 악과 연관된 지옥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일반적인 수준
에서 반대자들에 의하여 제기되는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지옥이 응보적 처벌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만일 이
렇게 되면 악을 소홀히 다루게 되는 것이다. (2)“일시적인 죄를 영원히 처
벌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인간의 삶을 입체
적으로 볼 때, 작은 기준선 하나의 실수가 전체를 망칠 수 있을 정도로 죄
는 심각한 것이다. (3)“죽음이 끝이 아니라 한 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는 의견에 대하여 그렇게 할지라도 또 같은 실수를 범할 것으로 본다.
(4)“지옥의 무서운 고통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에 대하여 이것은 지
옥에 대한 상징이며, 이것은 인간이 인간의 본래적 영혼으로 돌아가지 못
하는 죄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5)“사랑이 있는 사람은 지옥에 있
는 영혼들 때문에 괴로워하게 될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지옥
은 천국과 평행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며, 지옥은 바깥 어두움, 즉 비존재
의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6)“한 영혼이라도 지옥에 가면 전능하신 하
나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이 당신
이 만든 작품에 의하여 배반을 당하시는 것은 오히려 ‘기적’이며, 영혼이
궁극적 선에 이를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에 대하여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악의 문제와 연관시킬 수 없다고 보는 신정
론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별한 전제들을 서로 조화시키기
어렵다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 세 가지 전제는 모두 전통적인 기
독교 교리에서 인정하여 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창조주이
신 하나님은 전능하다. 즉 전능의 존재자이시다. (2)하나님은 자비하
시다. 즉 모든 일에 선하시다. (3)악은 존재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기독교 원리를 인정할 때, 신정론에 대한 딜레마는
다음과 같다. 만약 (1)에 암시한 대로 하나님이 악을 없앨 수 있으시면
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2)의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전제는 분명히
틀린 말이다. 만약 (2)에서 암시한 대로 하나님이 악을 없애시기를 원
하시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면, (1)의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은 틀
린 말이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은 악을 없애실 수 있고, 그렇게 하시기
를 원하시며, 실제로 그렇게 하신다면, (3)의 ‘악은 존재한다.’는 말도
틀린 말이 된다.
악은 신비가 아니며, 만일 그렇게 되면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
는 막연한 문제가 되어 버린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
에 대한 개인적, 공동적 책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숨어 계심에 대해 의미 있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죄와
하나님이 숨어계시는 신비와 연관되면 책임이 축소될 뿐만이 아니
라 심지어 죄가 어떤 신비스러운 악으로 대체되는 방식으로 악의 문
제는 과장되게 된다.
인간의 책임과 연관하여 기독교에게 주어진 커다란 도전은 인간의
내재적 악에 대한 인식의 부족함을 극복하는 죄의 교리를 체계 있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악이 우주적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식으로
만일 “인간 본질의 내재적 선함의 부적절한 발달”에 지나지 않는다
면,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