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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프랑스의 갈등과 통합
제 10강 : 현대 프랑스의 인종주의와 이민자 문제
서강대학교 전종호교수
현대 프랑스의 인종주의와 이민자 문제
19세기 말의 제2차 산업혁명 이후에 본격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수
입’하기 시작한 프랑스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만 해도 이민과
관련해서 인종주의의 문제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민노동자의 수가 정점에 이르고 경제위기가 한창일 때인
1930년대에도 프랑스에서는 이민노동자의 갈등보다는 전통적인 반유
대주의(anti-sémitisme)의 문제가
인종주의의 주요한 형태로서 나타날 뿐이었다.
현대 프랑스의 인종주의와 이민자 문제
오늘날 프랑스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종주의의 문제는 프랑스인과 문화와
종교가 다른 북아프리카인의 이주를 통제하는 데서 주로 나타난다.
프랑스사회에서 인종갈등의 표출이 단지 해당 인종 자체에 대한 거부감 때
문인지, 아니면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 또는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
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현대 프랑스의 인종주의와 이민자 문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북아프리카, 특히 알제리와의 관계,
그리고 알제리 이주민의 프랑스 사회에서 통합 문제에 대한 검토가 필
요하다. 프랑스에서 이민통제정책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정치세력이 민
족전선(Front National)이다.
이 정당은 이민정책을 기반으로 1972년 창당 당시 단순한 하나의 소수
정파에서 현재 프랑스 제3의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했고 지난 대선에서는
제2의 정치세력화 하였다. 이들의 인종주의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에 대
한 검토도 필요하다.
프랑스 인종주의의 역사
인종주의는 간단명료하게 정의 내리기 어렵지만, 그 기원은 분명히 ‘나’와
‘타자’ 의 <차이>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차이>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구
분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인종주의의 이론은 1853년프랑스의 고비노
(Joseph Arthure de Gobineau)의 『인종 불평등의 소고 Essaie sur
l'inégalité des races humaines』가 나오며 공론화 되었다.
그러나 이 이론이 구체화 된 것은 우리에게 『민족이란
무엇인가?』로 익숙한 에르네스트 르낭 (Ernest Renan)
에게서였다. 그는 인종사이의 차이를 본격적으로 이론화
한 인물로 흑인에 대한 백인의 지배를 정당화 했다.
프랑스 인종주의의 역사
이러한 프랑스 인종주의는 기존의 생물학적 인종주의와는 다른 프랑스적인
특징이 있다.
우선, 고비노의 인종주의는 정작 프랑스에서
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가 주장한 혈통, 유전적인 요소에 의한 인종간
의 불평등의 논리는 프랑스의 자유주의, 평등
주의의 논리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고, 무엇보
다도 이를 범 게르만주의자들의 지적 전통으
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인종주의의 역사
이는
자연적인
근거로
인간을
구분하지
않 생물학적인 요소가 아니
반면에
르낭의 특징을
인종주의는
19세기
중반부터
이미
았다는
프랑스의
자유주의
어긋나설명하려 하였다. 즉 그는
라 역사,점에서
언어, 심리
등 다른
코드로전통에
인종개념을
지
않으면서도,
‘언어’,
‘문학’,
‘종교’,인류학적인 문제라기보다
인종간의
우열을한편으로는
인정하였으나
인종을
혈통이나
‘역사’,
‘문명’의
다섯이해해야
가지 기준과
존재인
는 문화적인
문제로
함을 ‘도덕적
주장했다.
인간에 대한 존중’을 매개로 하여 기독교와 유럽
문명, 즉 서양을 대표하는 아리아족과 이슬람교
및 유대교와 동양을 상징하는 셈족간의 우열을 설
정함으로 인종간의 불평등을 재현했다.
즉 그는 아리아족, 인도-유럽어족, 기독교가 최상
의 인종을 정의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주장한다.
프랑스 인종주의의 역사
여기에 그는 흑인과 황인에 대해서는 당시 널리 퍼진 생물학적인 인종주의
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여 인종의 구분에서 최하위에 위치시킨다.
그는 각 인종에 일종의 역할 분담을 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자연은 노동자의 종(種)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중국인이며〔...〕, 토지
의 일꾼의 종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흑인이요, 〔...〕주인이자 군인의 종
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유럽인이다.”
(Ernest Renan, “La Réforme intellectuelle et morale de la France” in
Oeuvres complète de Ernest Renan, tome I, p. 390).
프랑스 인종주의의 역사
이러한 르낭의 인종개념은 19세기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이었
으며 차후 프랑스내의 인종주의적 성향, 특히 반유대주의나 현대 프랑스 사
회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이슬람교도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
가 된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참전했던 중국인, 알제리인 등은 인종갈등
을 야기하기에는 소수였고, 전후 재건의 필요성 때문에 대규모로 프랑스에
이주한 폴란드,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 노동자들은 경제위기 동안 프랑스
인들과 갈등관계에 있었으나 같은 유럽인으로서 인종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프랑스 인종주의의 역사
프랑스에서 이민으로 인한 인종주의의 문제가 대두된 시기는 알제리를 포
함한 마그렙인들이 프랑스에 대규모로 이주한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이
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프랑스의 경제 위기가 대규모로 유입된 외국
인 노동인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특히 알제리인들은 인종
주의의 주 대상이 되었는데, 8년 동안의 알제리 전쟁(1954-1962)로 알제
리의 경제가 피폐해졌고 1962년 맺은 에비앙 헙정으로 알제리인들은 두 나
라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인종주의의 역사
이러한 ‘통제되지 않는 이민’에 의한 알제리인의 대규모 유입은 프랑스와
알제리간의 충돌을 일으켰다. 즉 프랑스 내의 알제리인은 프랑스의 공권력
이 자신들을 모욕하였다고 비판하였으며, 이의 항의로 1961년 10월 17일
3만명의 알제리인이 파리중심부를 행진했을 때, 프랑스 경찰이 엄청난 폭
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결국 알제리 정부는 1973년 9월에 알제
리인에 대한 인종적 공격 때문에 모든 이민을 중단한다고 선언하였다.
프랑스 인종주의의 역사
프랑스 당국은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프랑스에 거주하는 이민에 대해 끈질
긴 통합정책을 추구하여 왔다. 대체적으로 불법적인 이민에 대해서는 단호
하였으나, 합법적인 이민에 대해서는 이들이 시민권을 얻도록 장려하고 프
랑스 공화국의 이념, 그의 세속문화 laïcité를 받아들이도록 촉구하였다. 즉
이러한 통합정책을 위하여 프랑스 당국은 학교교육, 특히 초등학교에서 이
민 2세대들에 대한 동화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프랑스 인종주의의 역사
알제리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이주민의 문제는 이들이 프랑스의 문화에 동
화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그 문제가 있다. 오히려 이들이 프랑스의 문
화에 통합되지 않으려 애쓴 측면도 있다. 바로 이점이 북아프리카 이주민과
이전의 유럽계 이주민의 문제와 다른 점이다. 북아프리카 이주민의 통합 문
제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바로 주택문제이다. 즉 경기 침체와 실업
등에 의해 이러한 이주민들은 대도시의 근교 banlieu에 모여 살게 되었는데,
프랑스 중산층이 점차로 이곳을 떠나며 이들과의 접촉 기회가 감소된 것이
다. 즉 각자가 사는 곳이 구별되며 서로간의 이해의 기회가 줄어든 것도 프
랑스 인종주의가 성장한 원인이 된다.
프랑스 민족전선과 신인종주의
프 랑 이어서
그는
스의 극
개인은
우 정
어떤
당인
사회집단-근대적
민 족 전 선 (Front
형
National)
태의
사회집단은
당은 자신들이
국가-안에서
주장하는
살아가기
이데올로기
때문
는 인종
에,
자신을
사이의
구현하기
우열을
위해지적하는
한 국가의인종주의가
일부가 되
아니라 하며
어야만
단지 당연히
문화의민족정체성의
차이를 지적할
감정을
뿐이라고
갖게
설명한다.
된다고
말한다.
이의 그러므로
대표적인자신을
이론가인
구현할
르 권리
갈루
(Jean-Yves
와
민족정체성에
Le Gallou)에
대한 권리는
따르면,
모든 권이
한 개인의
가운
가장
데
가장
근본적인
기본적인
욕구는
것이다.
자기와 남을 구분해 주
는 개인의 정체성과 개인을 ‘사회적 실체
social reality’의 일부로 확인해 주는 민족 정
체성의 추구이다.
프랑스 민족전선과 신인종주의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 민족전선의 이데올로기 제공자들은 민족 사이의 차
이를 제거하고, 민족정체성을 보편주의 철학아래 포함시키기를 원하는 사
람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민족전선은 프랑스적 가치와 프랑스의 문화가
다른 것들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않으며, 단지 프랑스 민족의 정체성은 알
제리, 튀니지 또는 모로코의 민족정체성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각 국가는 ‘다를 권리’가 있으며, 이것은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앙과 가치가 완전히 다른 마그랩과 블랙 아프리카 출신의 이민
으로 야기되는 위협에 대해 프랑스 민족의 정체성을 수호하는 것이 불가결
하다.
프랑스 민족전선과 신인종주의
이러한 주장은 민족전선의 부총재였으나 1999년에 분당하여 새로운 극우정파인 공화국민
족운동(Le Mouvement National République)의 지도자가 된 메그레(Bruno Mégret)에 의
해서 한층 심도 있게 보충된다.
그에 따르면, 유럽인은 같은 민족적 기원, 같은 종교, 같은 역사, 관습 및 도덕을 공유한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인의 민족정체성은 “공유된, 비이성적인,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가치로
부터 유래한다. 그에게 “국가란 영토, 사람, 그리고 문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랜 노력 없이
는 존재할 수 없다. 여러 세대가 흘러야만 민족이 되는 것이다. 보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처럼 이 구조 전체가 이슬람과 아프리카, 아시아인을 통합시키기 위해서 수정, 재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장은 어리석다”.
프랑스 민족전선과 신인종주의
민족전선당의 총재인 르펜(Jean-Marie Le Pen) 또한 민족정체성의 신성
한 본질을 강조한다. “조국은 우리 아버지의 나라이다. 시골과 도시, 언어와
역사로 형성된 나라, 이들의 노력에 의해 부유해지고, 이들의 땀과 피로 비
옥해진 나라〔...〕우리는 프랑스가 천년 이상 지속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라고 하며 “외국인들은 인위적인 행위, 자신들의 피를 흘리는 행위
에 위해서만 프랑스에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민족전선과 신인종주의
민족전선은 인종은 과학적 개념 정의가 아니며, 인종 사이에 우열은 없다는
생물학자들의 견해에 동감을 표시한다. 그러나 집단이나 문화, 또는 민족이
자신들의 뚜렷한 특질을 보호하기를 원하고, 다른 신앙과 성격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나타날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말한
다. 완전히 다른 문화, 종교적 전통을 가진 이주민의 위협적인 쇄도에 대해
프랑스 민족이 자신들의 각별한 특징을 보호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므로
민족전선을 공격하고 이민을 보호하는 자들은 반프랑스 인종주의자들인 것
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책이 궁극적으로 프랑스 민족을 파괴할 것이기 때
문이다.
프랑스 민족전선과 신인종주의
결국 민족전선에 따르면,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사람들, 즉 자신이 누구인
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또는 자신을 구성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민족(people)은 사형선고를 받은 민족”이며, “어떠한 민족도 자신과 완전
히 다른 문화에 속한 수많은 외국인들은 동화시켜 통합시킬 수 없다.
프랑스 민족전선과 신인종주의
이러한 이론을 타기에프(Pierre-André
Tauieff)의 정의에 의하면 고전적 의미에
서의 인종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인
종주의, 즉 신인종주의(néo-racisme) 또
는 문화적 인종주의(racisme culturel)라
고 한다. 신인종주의라는 것은 “문화 차이
를 절대화 시키는 것”에 근거를 둔다.
즉 집단 사이의 문화 차이를 명백히 하는
것으로, 둘 사이의 융합이 서로를 구분 짓
는 유일한 특성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민족전선과 신인종주의
이러한 이론으로 민족전선은 이민을 반대한다. 특히 그들은 이민에 의해 프
랑스의 실업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여론을 조성한다. 이민자들의 상대적으
로 높은 출산율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하는 이민
과 실업율의 관계에 대한 통계는 조작되거나 과장된 것이 많고, 이들이 인
종사이의 우월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나 이들의 발언에는 공공연한 우월
의식이 표출된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이민이 프랑스의 사회 안정에도 심각
한 위협을 끼친다고 주장하는데, 즉 이민이 ‘실업의 주체이며, 프랑스 경제
에 부담’이 되며, 심지어 이들 이민이 상당 수 범죄자들로 구성되어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민족전선과 신인종주의
민족전선은 1974년 대통령선거와 1978년 총선에서 심각한 패배후 정책을
더 온건화 시켰다. 즉 민족주의적 우파의 전통적인 가치인 낙태법 폐지, 가
정의 수호, 사형제도 회복, 가톨릭 학교 지원 등을 지지하였고 이는 특히 프
랑스 내의 가톨릭 원리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반유대주의 같은 인
종주의적 선전을 억제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민족전선은 서서히 힘
을 얻게 되는데, 특히 1981년 대선에서 좌파연합이 승리함으로 프랑스 우
파 유권자들이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연이은 이민에 대한 좌파 정부의 너그
러운 입법과 형벌정책의 자유화는 우파 유권자를 민족전선으로 기울게 하
였다.
프랑스 민족전선과 신인종주의
2001년 3월에 발표된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프랑스인 응답자의 60퍼센트
가 프랑스에 외국인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며, 63퍼센트는 마그렙인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또한 69퍼센트의 응답자는 자신이 인종주의적인 감정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고 생각한 반면, 28퍼센트만 자신이 인종주의자라고
전혀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 박단,「현대 프랑스 사회의 인종주의
- 민족전선의 이민정책과 신인종주의」『서양문명과 인종주의』, 지식산
업사, 256-257쪽에서 재인용)
프랑스 민족전선과 신인종주의
여기에 재미있는 것은 이민문제를 정치의제로 올려놓은 정당이 바로 ‘어제
까지도’ 국제 프롤레타리아주의를 외쳐오던 프랑스 공산당이라는 사실이다.
1980년 11월 4일에는 공산당이 이민의 중지를 주장하였고, 몇 주 뒤 크리
스마스 이브에 파리 근교 비트리-쉬르-센느 (Vitry-sur-Seine)지역에서
공산당 시장의 지도 아래 공산당 노동자들이 불도저를 동원하여 말리 출신
의 노동자 거주지의 전원공급장치와 계단을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민족전선과 공산당이 사회적으로 비슷한 지지계층을 갖는다는 점이다.
프랑스 민족전선과 신인종주의
(표) 이민자, 이슬람, 치안에 관한 프랑스인 여론 (%)
출전 : 한승준, 「프랑스 동화주의 다문화정책의 위기와 재편에 관한 연구」『한국행정학보』
제42권 3호, 2008 가을, 470쪽
프랑스 민족전선과 신인종주의
그러면 프랑스 사회는 이러한 인종주의 즉 신인종주의에 우호적인 사회인
가? 프랑스 사회에는 민족전선의 정책에 반대하는 SOS-racisme과 같은
사회단체나 개인들이 적지 않다. 또한 오늘날 프랑스에서 어느 누구도 공개
적으로 자신이 인종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프랑스인이 옳고 그르건 간에 자신들의 민족정체성이 밖으로부터의
침략(미국화), 또는 내부로부터의 위협(높은 출산율을 갖고 있는 이슬람 문
화의 이민)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한 계속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할 정치세력을 갈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토양은 민족전선의
중요한 토양이 된다.
프랑스 다문화주의의 문제점
프랑스의국가와
1905년
문화갈등의
교회의대표적인
분리법 이후,
사례가
종교적
바로 표현이
‘헤드스카프’
사적
사건이다.
영역이
됨으로써
이 사건수십
이후년프랑스인들의
동안 가톨릭, 이슬람
유대교 문화에
등 주요대한
종
감정이 세속화
교들은
더 악화된
진영과
측면이
불편한
있다.
관계를
1989년
유지했다.
파리 근교의
그런 가운
중학
교에서
데
‘헤드스카프’
세 명의 마그렙
사건은 여중생이
프랑스에 수업시간에조차
항구적으로 정착한
종교적인
북아
이유로 이슬람식
프리카인과의
‘평화적
헤드스카프를
관계’를 깨는
벗으려
계기가
하지되었다.
않자 이들이
이것
퇴학당하는
은
공적 영역과
사건이
사적벌어졌다.
영역의 경계에
시간이 대한
지남에
새로운
따라 논란을
국지적
사건에서 전국적 사건이
불러일으켰으며,
정교분리원칙
되어버린
논쟁을
이 문제는
재연시켰다.
프랑스내에서
이제
급속하게
프랑스
내의
북아프리카
이슬람교도에게
이민에 대한
정교분리원칙을
여론을 악화시키는
강요하기계기
힘
가 되었다.
들게
되었다.
프랑스 다문화주의의 문제점
1999년
공화국의12월
‘신성한’장소인
프랑스의 내무장관인
학교에서 종교적
슈베느망(Jean-Pierre
상징물을 드러낼 Chevènement)
수 있는가에 대
은
한 프랑스
문제로부터
내 이슬람을
프랑스인들이
조직화하기
차도르를
앞서입고
이슬람
있는종교지도자들에게
호메이니를 연상하거나
우선적
으로
‘폭력적’인
1905년
이란
정교분리원칙과
혁명을 상상하는
헌법에
것은
따른다는
부자연스러운
것에 서명할
일이 아니다.
것을 요구하였
이슬람
다.
의 문제는
그러나극우파의
그들은 이주장에
시도에앞서
대해확실히
“무슬림에
문화적인
대한위협으로
시민적 충성심을
인식된다.
의심하
는 것”이며 자신들에게 “굴욕적”이라고 평가하며 크게 비난하였다.
Jean-Pierre Chevènement
프랑스 다문화주의의 문제점
일반적으로 이민에 대한 정책은 프랑스식의 동화(intégration)주의와 영미
식의 다문화주의의 개념이 있다. 프랑스는 공화주의적 전통에 입각하여 문
화적, 민족적, 종교적 다양성을 기존의 다수 집단이 채택하고 있는 ‘공화주
의적 동질성’의 틀안에 융화시킨다. 이민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특징과 문화
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사적인 영역에서 은밀하게 보존되는 데
그친다. 즉 프랑스가 이민 2세들의 시민권 요구에 대해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조건으로 프랑스 사회로의 철저한 동화를 요구한다.
프랑스 다문화주의의 문제점
특히 1990년대에 들어와서 이전의 ‘다를 권리’, ‘소수’, ‘문화적 차별성’과
같은 다문화주의와 연관된 논리는 약화되었고 전통적인 동화의 논리가 강
화되었다. 그 이면에 마그렙 이민과 프랑스인 사이의 식민지 역사의 갈등구
조가 자리잡고 있고, 경제위기에 따른 실업자의 증가와 ‘헤드스카프’사건과
같은 일련의 사건에 의해 강조된 이슬람교의 이질성들이 프랑스의 문화적,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프랑스 다문화주의의 문제점
(표) 동화주의와 다문화주의 모델의 특징 비교
구분
동화주의 모델
다문화주의 모델
문화적 지향
- 문화적 동질화 추구
- 추상적인 타문화 이해와 수용
- 문화적 이질성 존중
- 구체적인 타문화 인정과 보호
정책목표
소수집단의 주류사회로의 동화
소수집단의 고유성 인정을 통한 사회통합
완전한 동화를 통한 사회갈등해소
완전한 참여를 통한 사회갈등해소
갈등해소방안
정책수단
다양성개념
평등개념
이주민에 대
한 관점
비판
소수집단 차별방지의 법제화 (소극적 수
단)
소수집단 문화와 권리보호의 법제화(적극적
수단)
사적영역의 문화적 다양성 보호
사적, 공적영역의 문화적 다양성 보호
기회의 평등
결과의 평등
- 노동력, 이방인
- 통합의 대상
- 사회구성원
- 사회다양성의 원칙
- 이주민동화의 현실적 어려움
- 이주민에 대한 현실적인 사회적 배제
민족정체성 약화 및 사회적 분열 초래
참고문헌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 한겨레신문사, 2001.
박단,「현대 프랑스 사회의 인종주의 - 민족전선의 이민정책과 신인종주의」
『서양문명과 인종주의』, 지식산업사, 243-269쪽.
『프랑스의 문화전쟁-공화국과 이슬람』, 책세상, 2005.
신행선,「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의 ‘인종’과 인종주의」,
『서양사론』 제73호 (2002), 5-28쪽.
http://fr.altermedia.info/general/conference-de-jean-yves-legallou_13937.html
http://www.nationspresse.info/?p=131337
서울대학교 불어권 문화연구소,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강, 2008. (특히 1
부의 오영주, 「신의 왕국에서 인간의 사회로」를 참조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