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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20
컴퓨터 공학
김 지 인
프랑스 역사의 시작은 대체로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 1세(Clovis Ier)
가 갈리아 지방의 가장 큰 부분을 정복했던 486년으로 알려져 있습니
다. 프랑크 정부 후의 프랑스 정부는 이 시기부터 중단 없이 존재해온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이며 만약 프랑스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대략 1190년이 돼서야 사용되었다면 필립 2세의 상서국이 왕을 가리
키기 위하여 프랑크족의 왕이란 단어자리에 프랑스의 왕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때 프랑스라는 단어는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되었
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프랑스 자세한 연표에 대한 링크
http://www.helianthe.or.kr/Data/chronologie%20de%20l'histoire%20
de%20france/chronologie%20de%20l'histoire%20de%20france.htm
원인 : 영국은 1066년부터 노르만 왕조 성립 이후에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끊임없는 분쟁이 계속 되
었습니다. 그러나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
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
에 오르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카페 왕가 출신
(샤를 4세의 누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
하면서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습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결국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 공급을 중단하고 프랑스 왕 필리프 6세
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가옌, 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고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
을 띄우게 됨으로써 전쟁은 시작되게 됩니다.
.
백년전쟁 제 1기
백년전쟁은 1339년 플랑드르와 북프랑스에서 양국군 사이의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340년 영국 함대는 라인강 하구에 있는 슬로이스에서 프랑스 함대
를 격파한 뒤, 1345년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맏아들 흑태자 에드워드
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고
1345년 장궁대를 활용하여 전력이 우세한 프랑스 기사군을 격파하
고 칼레 시로 진격하여 1347년 정복당하게 됩니다.
그 뒤 양국에 페스트의 유행과 재정상태 악화로 인해 전쟁이 중단
되었다가 1355년 흑태자가 다시 남 프랑스를 침략하게 되고
1350년 필리프 6세가 죽고 장 2세가 즉위하였으나 1356년 흑태자는
장 2세가 인솔한 프랑스군을 푸아티에전투에서 승리하고 장 2세를
포로로 잡게 됩니다.
백년전쟁 제 1기
전쟁 초기의 영국군의 일방적인 승리는 장궁대 전법이 프랑스의 봉
건 기사군의 전법에 비해 우수하였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전쟁의 참화와 영국군의 약탈로 농민의 피폐가 격심
하여 1358년 농민 반란인 자크리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반란은 즉시 진압되었지만 프랑스는 매우 심한 궁지에 빠졌고 그
결과 브레티니화약이 성립되어 장 2세의 석방보상금 300만 크라운
과 아키텐 지방 전부와 칼레시 등의 영토를 영국에게 할양하게 되었
습니다.
.
백년전쟁 제 2기
1364년 프랑스의 장 2세가 죽고 샤를 5세가 즉위하였다.
내정과 재정의 재건의 착수하였고 아키텐 지역의 귀족들을 선동하
여서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도록 하였고 이로 인해 전쟁이 재개되었
습니다.
프랑스는 육해군에 걸친 분전으로 1375년 부르지에서 휴전 협정을
통해 브레티니화약에서 영국에 할양한 대부분의 영토를 탈환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영국은 에드워드 3세가 죽고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
고 프랑스는 1380년 샤를 5세가 죽고 샤를 6세가 즉위하게 된고
영국에서는 와트타일러 난과 귀족의 반항, 그리고 양국의 왕이 모두
미성년이란 점에서 오랫동안 전쟁이 중단 되게 됩니다.
백년전쟁 제 3기
1399년 영국에서는 리처드왕이 폐위되고 헨리4세가 즉위하여 전쟁
이 재개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샤를 6세를 대
신하여 국정을 장악하려는 귀족들이 부르고뉴파와 아르냐크파로 나
뉘어 내란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1413년 헨리 5세가 즉위한 뒤 프랑스 내란을 이용하여 부르고뉴파
와 결탁하여 북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탈취하였고
이를 배경으로 1420년 트루아 조약을 맺고 스스로 샤를 6세의 딸 카
트린과 결혼함으로써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헨리 5세가 갖게 됩니다.
하지만 샤를 6세의 황태자 샤를 7세를 지지하는 아르냐크파는 오를
레앙을 거점으로 전쟁을 계속하게 됩니다.
백년전쟁 제 3기
142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샤를 7세가 왕위에 올랐음을 선언하였습니다.
1428년 샤를 7세의 거점 오를레앙을 포위하여 샤를 7세는 궁지에
몰리게 되지만 잔다르크의 출현으로 불리한 전황을 승전으로 전환
하게 되었습니다.
잔 다르크는 적은 수의 병사로 항상 선두에서 영국군을 격파하였고
그 결과 샤를 7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적법한 프랑스 국
왕의 직위를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트루아조약은 실상 그 뜻
을 상실하게 되었고 1430년 잔다르크는 부르고냐파에게 체포되어
영국측에 인도된 끝에 1431년 마녀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하게 됩니
다
.
백년전쟁의 종결
백년전쟁은 1453년 프랑스 왕가와 부르고뉴의 그적인 화해로 프랑
스에서 영국군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끝나게 되며
영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다시는 유럽 대륙의 영토를 넘보지 않게
되었다. 이후 영국은 독자적인 역사를 만들어갔다. 프랑스 또한 통일
된 영토 내에서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인 국가체계로 나아가
게 되게됩니다. 샤를 7세는 백년전쟁이 끝난 후 1456년에 가서야 잔
다르크의 마녀 혐의를 풀어주고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는데 이는 살
아 있을 때 그녀를 버리고 죽어서야 복권시킨 것입니다. 또한 잔 다
르크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교회는 1920년에 가서야 그녀를 성녀
로 시성 했습니다.
마녀로 몰려 19세 꽃다
운 나이에 화형 당하는
잔 다르크
잔다르크는 백년 전쟁의 영웅이며 앞에 말했다시피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는 듯 한 백년 전쟁을
열입곱살의 소녀 잔다르크가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사람들 앞에 나타나 샤를 7세에게
전쟁터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면서 프랑스 군이 모여있는 오
를레앙 성으로 달려가 목숨을 걸고 영국군
과 싸우게 됩니다.
그녀의
완전히
그러나
판결을
처하게
용맹스러운 모습에 프랑스 군은 용기를 얻어 전쟁의 분위기를
전환시켜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1430년 영국군에 잡히게 되고 잔다르크는 재판 끝에 마녀라는
받고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화형에
됩니다.
별칭으로 오를레앙의 소녀로 불리는 잔 다르크는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한명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5월 8일부터 1주일동안 그녀를 기리는 축제가 벌
어집니다.
오를레앙 잔 다르크 축제
앞에서는 해마다 5월8일부터 일주일 동안 진행된다고 했는데
2011년에는 4월29부터 5월 8일까지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영웅 잔다르크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축제가 진행된다고 합
니다.
오를레앙 잔 다르크 축제
피라미드광장의 잔다르크동상
프랑스 파리. 루브르미술관과 튈르리정원
사이에 있는 피라미드광장에는 잔다르크의
황금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