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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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의 “강림”과 그 전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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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전개 과정에서 가정 놀라운 두 가지 종국적
사건은 부활과 심판이다. 우리가 곧 보게 될 것처
럼, 이 두 사건에서 역사의 강의 여러 지류들이 하
나가 될 것이다. 이처럼 역사에는 여러 흐름들이
있지만, 전체로서의 궁극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들
은 두 가지 중요한 배수구를 통해서만 그 물을 바
다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지류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배수구가 오직 둘뿐이라는 것은 종말론이 그
절정에 이르는 과정의 본래적이고 종교적인 성격,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의 보수적이고 치유적인
성격에 기인한다.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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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은 죄에 의해서 도덕적 비정상성에 빠진 세계
의 진전 과정의 필연적인 총괄이다. 마찬가지로 부
활도 황폐와 죽음에 사로잡혔던 것을 회복시키는
구실을 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이루어진 곳에서
는 이 두 가지의 성체 자체가 이 세대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보이며, 그것을 배제하
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부활과 관련해서는 새로운
부가적인 요소가 고려되어야만 한다. 부활에 포함
되는 것은 죄와 죽음에 의해서 필요하게 된 치료만
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종말론적 과정은 사람
을 죄와 사망이 들어오기 전에 그가 서 있던 위치
로 되돌려 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 상태
이전에는 얻지 못했고, 또한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그 시험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더 높은 삶의 지평
에로 높이는 것이다. (p.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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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구속의 마지막 사건의 이 양면은 특별한 메
시아적인 색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구약에서는
여러 번 심판과 변혁에 의한 사물의 종결이 메시아
적 도움 없는 여호와 자신의 현현과 연관되었다.
사실 종말의 그 큰 두 사건을 메시아적 인물의 “강
림”으로 성격 지우는 것은 구약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p.117-118)
첫째로, 우리는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란 말을 바
울이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p.119)
유대 문헌 가운데서는 “파루시아”가 메시아의 강림
을 지칭하는 경우로 사용된 일이 없다. 종말론적
의미에 가까운 것으로 “의로운 하나님의 파루시아”
란 말이 사용된 일은 있다.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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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의 일반적인 용법에서나, 종교적―종말론적인 용
법에서나 이 말은 ‘도착’과 ‘현존’의 두 가지 밀접히 연
관된 개념을 표현한다. 즉 파루시아는 ‘현존하게 됨’,
즉 도착과 오랜 시간이나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현
존해 있음”을 의미한다. (p.120-121)
분명히 유의해야 할 중요한 점으로 이 말 자체에는 “다
시”란 개념이 전혀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이 명사는 ‘도착’을 의미하지 ‘귀환’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다. 따라서 이 말은 “재림”이라고 옮길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주님의 파루시아
를 말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사건이 사실 어떤
점에서는 성육신의 강림을 반복해 내는 두 번째 도착
이라는 사실을 유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식으로부터 “둘째 파루시아”라는 어구가 발전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p.1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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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파루시아”라는 어구가 발생하지 않았음을 초대
교회의 강력한 미래적 전망으로부터만 설명될 수 있다.
많은 것들이 메시아의 강림과 연관될 수 있지만, 마지
막 날들의 대격변만이 그와 연관될 수 있는 것이고 그
말과 관련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될 만큼 절대적으로
극치화시키는 사건들만이 메시아의 파루시아와 연관
된 것이다. (p.122)
바울에게 있어서 사건으로서의 파루시아는 격변적이
다. 파루시아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라, 어느 한 점에
이루어질 사건이다. 물론 강림이 “천년왕국”을 가져오
는가, 아니면 “영원한 상태”를 가져오는가 하는 문제는
이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결정될 수 없는 것이다. 파루
시아는 아주 궁극적 사건을 지칭하므로, 결과적으로
이 파루시아에 의해 열려지는 것은 종교적 의식에 최
고의 절대적인 중심점을 줄 것임이 분명하다.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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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적 파루시아는 전체로서의 영원한 상태로
천년왕국적 특색을 갖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
서 나타나는 것은 현세적 특색과 초월적인 특색의
절충인데 반해, 바울에게서는 주로 현세적인 특색
이 초월적인 것을 억제하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즉
초월적 하늘 세계에 대한 전망이 현세적 전경 안에
서 움직이는 구체적인 형상들에 의해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p.124)
바울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강림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둘째 용어는 ‘계시’(revelation,
ἀποκάλυψις)란 용어이다.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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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계시란 개념은 기독교보다 더 오랜 것이
다. 즉 이 개념은 예수께서 승천하심으로써 그의
숨기어진 삶이 시작되었고, 마침내는 마지막 날 그
가 다시 공개적으로 나타나심을 통하여 그쳐지게
되리라는 신념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는 말이다. 옛 종말론은 이미 이 계씨함의 이중 적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그 개념이
전적으로 지상적인 영역 안에서 움직였다. 즉 숨기
는 것과 드러내는 것[계시] 모두가 여하튼 땅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p.124)
“계시”란 용어에 전문적(신학적) 의미를 부과하여,
이를 자주 초자연적 영역으로부터 지상적 영역에
로 위대한 것들이 내려오는 것에 적용한 것이다.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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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루시아”는 주로 신자들에게 관심하고, “아포칼
룹시스”는 하나님 백성의 대적들에게 주로 관심한
다. (p.126)
신자들도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그들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계시’의 성격을 갖는다.
예수의 종말론적 계씨는 명백히 순간적이고, 이적
적인 행위의 특성을 갖는다는 개념은 모든 구절에
분명히 함의되어 있다. 물론 그에 앞서서 그것을
준비하는 일들이 모두 점진적으로 질서 있게 전개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강림 사건
[계시 사건] 자체는 절대적으로 격변적이다.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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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강림을 지칭하는 세 번째 용어는 “헤
헤메라”(ἡ ἡμέρα, “그 날”)란 말이다. (p.127)
그 용어들은 단지 다가오는 사건만을 표시하고, 그
에 대한 그 이상의 종말론적 사변을 회피하는 것이
다. 바울은 이 주제를 아주 광범하고 추상적인 방
식으로 다루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러
나 이것은 그 용어들이 구체적인 내용으로 가득 채
워질 수 있는 그런 성격을 가졌다는 데에서 기인하
는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은 바울의 마음에서 작용
하고 있었던 종말론의 구성적이고, 역사 형성적 역
할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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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4의 “때가 차매”(πλήρωμα τοῦ
χρόνου)란 어구는 확정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사의 이전 단계들의 질서 있는 전개를 함의하
고 있다. 물론 이 어구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그리
스도의 “초림”에 대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강림” 사이에 있는 전체 드라마가 바울에게 있어
서 한 단위를 구성하는 것이어서 마지막까지의 질
서 있는 진전이 초림의 특성이었다면, 전체의 절정
적 종국에 대해서도 비슷한 접근을 해야 할 것이라
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바울은 아주 구체
적인 방식으로 현 세대의 지속이 명확한 한계를 지
니고 있음을 말하고, 동시에 오는 세상의 도착점도
분명히 확정시킨다. (p.13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