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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 경교 & 천주교 -
경
교
■ 기원과 전래
■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 중국전래와 포교활동
■ 위기와 소멸
■ 신앙개조 특색 / 실천신학
■ 경교의 기원과 전래
경교는 주후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제3차 전교회회의에서
동로마제국 수도 큰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 주장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씨릴(Cyril)은
네리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정죄되면서부터 생겨난 기독교의 한 분파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체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지나치게 분리한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정죄당했다.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는 이집트 먼 사막으로 끌려가
451년 그 곳에서 사망한다.
그의 제자들이 페르시아(현재의 이란) 제국에서 피난처를 찾아
그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전도하며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교회가 바로 중국에서 경교라고 알려진 네스토리안 교회이다.
그들은 신학교도 세워 선교사들을 양성하여 파송하였는데
인도, 아라비아, 중국, 타타리(Tartary)까지 전도를 하였다.
고대 동서 간의 교역의 길을 북방으로는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지대와 중앙 아시아의 오아시스 지역과 유라시아 대륙 남방의
해양로를 들 수 있다. 실크로드는 한대로부터 개척된 것으로
한대 이후 동서 문화 교류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으면
중앙아시아 및 서양의 종교들이 이 길을 따라 중국에 전래 되었다.
실크로드
■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1625년 중국의 서안부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이 비석은 덕종 2년인 781년, 안록산의 난 때 공헌이
있었던 경교사(景敎師) 이사의 진언에 따라 황제의 윤허를
얻어 제작되어, 대진사내에 세운 것이다.
박해가 일어나자 신자들은 중국 전래에
대한 자료를 보존할 목적으로 이 비석을
땅에 묻고 피난길에 올랐는데,
이것이 후에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이 비에 시리아 어와 중국어로
네스토리우스 선교사가 어떻게 중국에
와서 선교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대진 경교
유행비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 경교의 중국 전래와 포교활동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들어온 알로펜을 단장으로 한
네스토리우스 파 선교사 21명이 중국에 도착한 것은
주후 635년이었는데, 이 때가 당(唐)나라 태종(629-649)
9년이었다. 알로펜 일행은 당 태종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이 교는 도덕적으로 숭고하며 심오한 신비성을 풍부히 가지고
평화를 존중하는 종교 이므로 나라가 공인하는 종교로 한다.”라는
말과 함께 태종의 칙령에 따라 경교는 당의 조정이 공인하는
종교가 되었다. 토지와 건물(파사사) 제공받고 경전을
번역함으로써 중국에서 선교의 길을 크게 열어 놓았다.
당나라에서는 이 종교를 페르시아에서 왔다하여 파사교라 했고,
후에 이 종교의 진원지가 로마라하여 로마라는 한자인
대진(大秦)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후에 광명의 종교란 의미인
‘경교(景敎)’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650년 태종을 이은 고종은 전국 각지에 사원을 건설케 하고
알로펜을 높이어 진국 대법주로 삼았으니 이 때부터 경교는
국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계속적인 지원과 보호아래 당나라
285년 동안 경교는 약 200여년 간 황실의 보호와 국민들의
호응 속에서 착실하게 그 선교의 영역을 넓혀 갈 수 있었다.
<알로벤에 의해 전해진 경교선설>
■ 경교의 위기와 소멸
9세기 중엽 열렬한 도교 신자였던 무종(840-846)이
등극하면서 불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때 3000명 이상의 경교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 환속을
당하면서 당나라에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되었고
경교도 역사의 종말을 맺게 되었다.
■ 경교의 한국선교 가능성
경교가 당나라에서 활발하게 선교되고 있을 때
당시의 한국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시기였다(주후 668년).
이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적으로, 무역으로, 불교의 승려들을
통해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와 당나라간의 잦은 교류 과정에서 자연히
당나라에서 널리 유행했던 경교가 신라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추측하기에 충분하다.
●주장
❶ 경교의 신라 유입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
영국인 여류 고고학자 고든(E.A.Gordon)
그녀는 경주의 불국사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상,
나한상 등의 불상에서,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의
능이나 묘 앞에 세운 무인상 등에서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고든은 자기의 연구를 기념하기 위하여 금강산 장안사에
‘대진경교 유행중국비’의 모조비를 세웠는데
이 비가 1917년에 발견되었다.
❷ 한국 교회사 연구의 개척자 김양선 목사
그는 고든의 이 같은 주장을 가장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주장 한 분이었다. 그는 경교의 한국전래 가능성을 뒷받침한
증거로서,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십자가,
마리아의 모습을 닮았다는 관음상,
또한 전남 해남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다는
동십자가 등을 제시하였다.
<불국사 동십자가>
<관음상(마리아 상)>
그러나 경교의 한국 전래는 확실한 사료(史料)가 없기에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단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경교는 정통 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한 교회이므로
이단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경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정착했다면 이단 교회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경교가 한국에 뿌리내리지 않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다행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 경교의 신앙개조의 특색 / 실천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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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를 신모(神母)로 숭배 반대
십자가 이외의 형상 사용금지
사후 속죄론 부인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영 임재설 주장
성서의 기도문, 찬송은 시리아어 사용하되 희랍어, 라틴어 사용
영관, 욕수(세례)시행시 죄를 깨끗이 씻는다.
십자가의 인으로 만민을 융화케 한다.
목종(木鐘)을 쳐서 인혜(仁惠)의 음을 떨치게 한다.
동방을 향하여 절함으로써 생명의 길을 지향케 한다.
자기를 위하여 물질을 쌓아 두지 않고 귀천의 분별 없이
만민이 고루 살도록 힘쓴다.
* 매일 일곱 번씩 예배를 드린다.
* 7일에 한 번식 마음을 깨끗케 하여 정결한 신앙을 가지도록 한다.
천주교
■ 로마 가톨릭교의 전래
■ 학자들의 교리연구
■ 한국 천주교회의 창시
■ 수난 당하는 가톨릭
■ 선교사 들어오기전 나가서 만나서 받음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1636년에 국호를 청이라부른
만주의 여진족은 자기들의 요구를 안들어 준다고 10 만을 이끌고
임진란 40여 년 만에 한국을 침공. 이때(인조14년)에 우리나라
조종 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항 했지만 결국 남한산 성에 쫓겨가서
투항했다가 1637 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삼정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항복.
이때 인조의 소현 세자와 대신들이 청의 심양으로 끌려감.
•1644년에 끌려간지 7년 만에 청이 명을 정복하고 수도를 심양에서
명 의 북경으로 천도(소현세자 등도 같이 감)
•그때에 베이징에 아담 샬(주교)이 묵고 있었는데 소현세자가 만나
친분나눔.(2달 동안)-소현세자가 기독교 저술을 읽을 기회가 있었음.
•아담 샬은 청나라 왕의 신임얻어 통감목사(벼슬)라는 위치에
까지감.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정책은 어느 나라에서 선교하든지
왕실과 고위층에 먼저 접촉하는 의도가 있었음.
•소현세자가 귀국하게 됨
이때 서양문물, 기독교 서적을 아담 샬이 줌. 그것을 가지고 온
소현세자는 곧 죽게됨.
•당시 척불 숭유로 인해 임진, 병자호란으로 당하자 조종에서는
이때부터 조선 경제의 개조책이라는 책도 만들고
새로운 학문들이 일어남.
■ 학자들의 교리연구
중국을 섬기던 조선에서는 사절단을 보내는 데 정초에 성절사,
원단사, 동지사, 천추사등을 북경에 파송했다.
(사절단은 한 행차에 300- 500명 정도가 50일에걸 려 가서
50일 정도 머물고 돌아왔고 진상갈때에는 비단, 금, 은, 보석,
호피, 좋 은약 등을 가지고 갔다.)
* 1601년에 마태오리치가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남당이다.
아담 샬이 살던 곳에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동당이다.
* 1603년 마태오리치가 쓴 '천주실의' 란 책을 그때 진상 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져옴.
* 조선조 시대에 주자학이 당쟁에 질리고 허례허식 하던 때에
나라 기강 이 안 잡혀서 이때에 학자들이 '천주실의'를 가져오자
연구했다.
* 조선조 이 수광 이라는 사람이 '지봉유설'을 썼다.
지봉유설 - 천주교에 대해 설명함. 윤회를 부정하고 착한 일에
보상이 있고 악 하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와 교황은
임기가 끝나면 좋은 사람을 투표로 뽑 고 이웃을
제 2의 나라고 하는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수광은
마태오리치와 동 시대의 사람이다. 임진란 전후로
세 차례의 명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과학책, 천주교
책을 가져옴.
*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했다.
(사람들이 서학에 관심을 많이 가짐)
* 유인용
-'어우야담' 제 1권에서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언급함.
허균이 천주교를 믿는 것을 말하고 그 교가 동남의 오랑케에게
퍼져 믿는 자가 많은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고 밝힘.
* 허균은 만주국에서 언젠가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형 당했다 (그는 천주교인)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 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
(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강조)
■ 한국 천주교회의 창시
● 이승훈의 영세
한국 천주교회는 그 시작을 1784년인 이승훈의
영세로 잡는다.
왜냐 하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영세를 받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승훈의 영세는 한국 천주교사에서
가장 뜻 깊은 사건이며, 한국에 기독교가
시작된 분기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승훈의 영세를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으로 보지 않고 같은 해인 1784년이지만
세례를 통해서 모인 신앙공동체가 교회 창설기로 보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교회 창설 기념이란 이승훈의 세례에 기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승훈
을 중심으로 해서 조직되었던 신앙공동체의 출범으로 두고 있는 것이다.
참고적으로, 이승훈이 영세를 받은 해인 1784년은 한국 개신교의 첫 선교
사인 알렌(Horace N. Allen)이 입국한 1884년에서 정확히 100년 전으로
써 개신교보다 1세기를 앞선 교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 천주교 시작의 특징
한국의 천주교회는 결국 선교사가 입국하여 전교한 결과로
신자를 얻는 일반적 형태와는 달리, 국외에서 신부를 찾아가 신앙을
고백하고 영세를 받는 구도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특징은 첫째로 외래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창설 되었다는 것, 둘째로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
나의 학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약 100년간은 학으로 연구하다가 교회가 창설
되었던 것이다
■ 초기 천주교의 배교자들
조정과 유생들이 처음 보는 사학(邪學)에 대한 탄핵의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박해의 손길이 거세어지자 초기에
신앙을 가졌던 이들이 하나씩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❶ 한국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의 배교(背敎)
이승훈은 영세 받은 지 7년 만에 동생 치훈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가
결국 1791년 배교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조선 천주교회의 반석이
되라고 베드로란 이름까지 받았던 이승훈은 배교자로서 오명을
남기고 말았다. 그는 1801년 2월 신유 교난시에 천주교인으로
참수 당하게 되었으나 배교자로 죽었다.
❷ 정약용의 배교
정약용도 1797년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면 목을 매어 죽겠다며 오랏
줄을 목에 매는 부친을 보고 교인들과 교제를 끊고 신앙을 버리겠다
고 말하고는, 배교를 입증한 후 번민에 빠져 괴로워하던 중 페스트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급사하고 말았다.
❸ 한국 천주교인의 배교 원인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두 선각자가 배도의 길을 간 것은 앞으로 다
가올 천주교의 박해를 견디어 나가야 하는 교우들의 신고(辛苦)를
예시해 주는 불길한 전조(前兆)임에 틀림없었다. 배교의 원인을 딜
레는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 무서운 고문을 극복하
지 못한 것, 난을 피해 외딴 곳에 은거함으로 인한 심한 굶주림을 참
지 못해 배교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 수난 당하는 카톨릭
● 수난을 불러 온 요소
-조상 제사문제
-붕당적 요소(당시 당파 싸움으로 인한 박해)
-황사영의 백서가 문제가 됨
● 카톨릭의 4대 박해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
■ 사진 자료
<카톨릭의 주요성지>
■ 사진 자료
주
교
요
지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
<1864년에 간행된 천주교 서적>
■ 사진 자료
<김대건 신부의 기념비각>
<상복을 입은 선교사>
■ 박해 사진
■ 박해 사진
■ 박해 사진
■ 박해 사진
■ 박해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