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문화재에 대해서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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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의 유래
문화재청에 등록된 정식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삼국
유사》에 나오는 원래 이름은 석불사이다.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예속되었고,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
이 석불암 대신 현재의 석굴암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
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
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
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
성이라는 개인의 원력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
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
대 불사였음을 알 수 있다.
석굴암 구조의 특징
석굴암은구조적특색은 무엇보다 화강석의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
적으로 축조한 석굴사찰이라는 점. 즉, 인도·중국 등의 경우와
같이 천연의 암벽을 뚫고 조성한 천연석굴이 아니다.
이 같은 토목기술을 바탕으로 이룩된 석굴의 기본적인 평면구
조는 전방후원의 형태를 취하면서 네모진 공간의 전실과 원형
의 주실로 나뉘어져 있다. 주실에는 단독의 원각 본존상을 비롯
하여 보살과 제자상 등이 있으며, 전실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등을 부조하여 배치하였다. 이 전실의 기능은 곧 예배와 공양을
위한 장소이다.
천장은 궁륭형의 둥근 양식이며, 그 위에 연화문의 원판을 두어 천
개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하여 팔부신중
8구, 인왕 2구, 사천왕 4구, 천부 2구, 보살 3구, 나한 10구, 감불
8구와 본존여래좌상 1구가 있다. 이들 불상의 배치에 있어 두드
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대 조형미술의 기본원칙과 같은 것이기도 하여서 석굴
의 안정감을 한층 강조하는 구실도 하고 있다.
조각상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건 본존여래좌상이다.
문무대왕릉이란?
문무대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에 위치해 있는 신라시대 제30대 문무왕의 수
중릉이다. 1967년 7월 24일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문무대왕릉은 ‘대왕
암’ 이라고도 불리며 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다.
문무대왕릉의 구조와 특징
문무대왕릉은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가운데 있는 그다
지 크지 않은 자연바위이다. 남쪽으로 보다 작은 바
위가 이어져 있으며, 둘레에는 썰물일 때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이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어 마치 호석
처럼 보인다. 대왕암에 올라보면 마치 동서남북 사방
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로를 마련한 것처
럼 되어 있다. 특히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는 파도를
따라 들어오는 바닷물이 외부에 부딪쳐 수로를 따라
들어오고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의 공간에
는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안압지의 구조와 특징
연못은 동-서 200m, 남-북 180m로 방형(方形)에 가까운데 땅을 파서 물을
끌어들이고 그 호안(湖岸)은 모두 석축하였다. 남쪽 호안은 밋밋한 직
선으로 하고 서쪽 호안은 건물의 배치에 따라 직선적인 굴곡을 주었는
데 반해 동쪽과 북쪽 호안은 40여 차례로 굽이치는 곡선형의 굴곡으로
축조하였다.
못 안에는 대·중·소형의 원도(圓島)를 마련하고 둘레를 석축하였으며,
흙을 쌓아 높은 가산(假山)을 만들었다. 안압지 주변에서는 모두 26동
의 건물터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5개소의 건물터는 서쪽 호안에서 못
안쪽으로 돌출되도록 석축하여 그 위에 건물을 세웠고, 역사기록상에
서 연회장소로 등장하는 임해전과 동궁터는 연못의 서쪽편 공간에서
발굴조사된 독립건물 5개동과 이를 연결한 회랑 8개소로 비정된다.
안압지에서 발견된 출토유물
종류별로 본다면 용기류로서 토기·자기·칠기, 철제 농공구와 무기류·마구류, 금동제
불상과 불구, 각종 목제품과 나무배, 그리고 한국에서 처음 출토된 목간등이 있
다. 용기 및 식기류로는 청동이나 금동제 합과 바리, 숟가락, 당대 청자와 백자
접시 ,묵서토기를 비롯한 명문토기, 큰항아리와 매병형-장군형 토기, 시루와 풍
로
그 밖의 실생활용구 및 민속자료로 당초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금동제 초심지
자르는 가위, 주사위와 같은 주령구,그리고 통나무배 등이 주목을 끈다.
첨성대의 내부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이 걸쳐 있는
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
의 반원에는 판석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첨성대가 쓰인 용도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다.
1350년이 지나고도 옛날의 그 모습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자랑스런 우리의 과학 유산이
다. 첨성대의 건립은 신라의 천문학 발전을
상징한다.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는 않지만
신라의 천문학을 관장하는 국가 천문기관의
중심적 시설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것
이다.
첨성대란?
신라 선덕여왕때 지어진 천문관측대로 별
을 통하여 24절기를 측정하고 동서남북
방위를 정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
측되는 유물이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된 관측대로 알려져 그 가치가 더욱 높
다 첨성대는 별을 담은 우물이라고도
불린다
천마총의 내부
구조를 보면 봉분은 직경 약 47m, 높이 12.7m로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고분이다. 봉토의 기저부에는 덧널부를 제외한 전면에 점토를 깔
았으며, 봉토의 축조는 하부에서는 거의 수평으로 쌓았으나 상부로 올
라갈수록 내부로 경사지게 봉토를 쌓아 올렸다. 둘레돌은 두께 약
1.2m, 직경 47m의 규모로 돌려져 있으며, 덧널과 돌무지는 지상에 설
치되어 있다. 돌무지의 동~서 직경은 바닥에서 23.6m를 보이며, 돌무
지의 상부는 동~서 15.5m, 남~북 13m의 크기로 말각방형의 평면을 보
이고 있다. 돌무지의 상면에는 점토대가 덮여 있었으며, 돌무지 내부에
는 주칠된 돌들이 덧널 가까이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었다.
덧널의 규모는 길이 6.6m, 폭 4.2m로 남쪽으로 약 17˚정도 기울어진 동~
서 방향으로 놓여 있었고 추정높이는 2.1m 정도였다. 덧널의 내부에는
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서 덧널 바닥의 자갈층 위에 길이 3.5m,
폭 1.8m의 범위에 목재를 깔고 그 위에 나무널(木棺)을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마총에서 발견된 출토유뮬
출토유물로는, 나무널 안에 4산형입식금관을 비롯하여 목걸이, 허
리띠 등과 함께 새머리장식고리자루큰칼 1점을 넣었다. 바닥에
쇠도끼를 4벌 놓고 그 위로 각종 용기류와 마구류 등을 가지런
히 쌓아 놓았다. 널 주위 석단에도 금모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와
철제이기류들을 놓았다.
덧널의 상부에서도 다수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봉분정상부의
점토층 내에서는 마구류 일괄품이 발굴되었다. 천마총에서 출
토된 유물 중에는 24개의 쇠뿔을 비롯하여 조형칠배 및 각형칠
배, 유리잔 등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희귀한 것들이 다수 포함되
어 있으며, 11,526점이나 되는 다량의 출토유물들을 통하여 신
라인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많은 귀중한 자료들을 얻게 되었
다.
불국사 소개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또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불국사는 부처님의 화엄의 세계인 불국토를 현세의 사바세계에 구
현시킨 열정적인 신앙의 완성체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비롯
한 수많은 국보문화재와 보물문화재가 있고 매년 수백만의 내
외국인 방문객들이 한국의 뛰어난 불교예술작품들이 자리한 불
국사를 방문하고 있다.
과거의 뛰어난 불교문화재 뿐만 아니라 현재의 불국사는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계시고 불조의 혜명을
이어가는 중심적인 수행 처이기도 하다. 또한 불국사는 한국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의 전시관으로서 세계에 한국불교와
한국의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1600년
한국불교 수행정진과 지혜의 도량으로서 오늘도 끊이지 않는
용맹정진의 푸르른 서기가 흐르고 있는 곳이 바로 불국사이다.
불국사의 석가탑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마주서 있는 석탑 가운데 서탑으로
국보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탑 또는 무영탑이라고도 하
는데, 석가탑은 동탑인 다보탑에 대칭되는 호칭이다.
이러한 호칭은 『법화경』에 이른바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나란히
앉아 하나는 설법하고 하나는 증명하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
인다. 따라서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의 탑이고 석가탑은
곧 석가여래상주설법의 탑이다.
그러나 이 탑에서 나온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는 1024년(현
종 15)에 불국사 무구정광탑을 중수하면서 남긴 기록인데,
1038년(정종 4)에 다시 옮겨 적은 것으로, 이 탑(혹은 다보탑)을
무구정광탑으로 지칭하고 있어 고려시대에는 불국사의 두 탑이
석가탑이나 다보탑으로 불려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불국사고금역대기』에 의해서 석가탑 창건을 751년으로
보았으나, 묵서지편에서 나온 두 종류의 중수기 기록으로 다보
탑과 석가탑 모두 대성각간의 주도하에 불국사 쌍탑으로 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창건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